“통계는 정책의 출발점입니다. 엉터리 통계로 경제정책을 펴니 제대로 되겠어요.”
김준경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2시간여 동안 진행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경제통계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KDI가 출범 직후 경험한 ‘쿠즈네츠 쇼크’를 소개했다.1972년 4월 KDI 개관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한 사이먼 쿠즈네츠 하버드대 교수는 KDI 수석연구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평가를 내놓았다고 한다. 197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쿠즈네츠 교수는 KDI 연구진이 인용한 통계의 출처와 정확성에 대한 검증이 없었기에 연구 결과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봤던 것이다. 김 전 원장은 “정부는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채 되레 시장 실패로 호도하고 신뢰성 떨어지는 통계로 합리화했다”며 “그 결과 공급 대책은 3년가량 지체되고 국민이 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정년을 앞두고 있는 그를 서울 동대문구 홍릉에 위치한 옛 KDI 별관(현 한국경제발전관)에서 만났다.
-정부가 자산버블 경고음을 울리고 있는 가운데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회색 코뿔소’ 위기론까지 들먹였다.
△자산버블론에는 장기 초저금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이는 세계 공통 현상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만의 특수성이 있다. 정책 실패로 인한 버블까지 겹쳤다는 점이다. 부동산에 불을 지른 정부가 자초했다. ‘회색 코뿔소’는 간과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면 큰 위험이 뒤따르는 것인데, 정부가 왜 평상시 올바른 정책으로 관리하지 않는가. 기획재정부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KDI에서 기재부를 봐왔는데 지금은 어떤가.
△단순 정책 집행 부서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부처 명칭에 담긴 기획이 없다. 장기적 관점의 미래 정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면서 경제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컨트롤타워’ 기능도 실종된 것 같다. 단기 대책 위주이고 정치적 어젠다를 뒤치다꺼리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기획과 조정·실행·피드백 등의 거버넌스가 무너졌다.
-오죽하면 ‘청와대 정부’라고 비판하겠는가. 기재부의 한계는 있는 것 같다.
△경제정책의 정치화가 구조적 리스크로 고착화하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실패로 끝난 소득 주도 성장이 그랬고 잘못된 부동산 정책은 집값 폭등을 낳았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16개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포함한 23개 공공투자 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일괄 면제한 것은 경제정책 정치화의 대표 사례다. 지역별 나눠 먹기 식 예타 면제는 선거용 매표 행위로 대의민주주의 정치를 크게 퇴보시켰다. 예타 제도가 무력화하는 순간 경제 논리는 실종되고 포크배럴(pork barrel·선심성 예산) 정치가 판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경제성만 따진다면 지방 SOC 사업은 추진하기 어려운데.
△예타는 경제성만 따지지 않는다. 지역 균형 측면도 고려한다. 제도 역시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SOC 사업을 꽤 많이 추진해 투자의 생산성 증가 효과(한계자본생산성)가 매우 낮다는 실증 연구 결과가 있다. 도로와 공항은 제로에 가깝다. 투자 효율이 높은 SOC 대상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의미다.
-KDI가 정책의제 발굴 등에서 영향력이 줄어든 느낌이 든다.
△KDI의 미션은 과학적 분석과 실증 연구를 통해 국가 발전 전략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가 전 세계 1만 1,000여 개 싱크탱크를 대상으로 조사한 ‘2020년 글로벌 싱크탱크 평가’에서 KDI는 세계 15위(미국 제외 5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에서는 부동의 1위였다. 그러나 정부는 해외에서 인정하는 KDI 두뇌를 활용하려 하지 않는다. 장기 국가적 과제와 과학적 분석에 관심이 없다 보니 그런 연구를 맡기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KDI를 무력화하고 성가신 존재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고립된 KDI 연구진에게 비전을 제시하기 어려운 현실이 안타깝다.
-현 KDI 원장이 소득 주도 성장 정책 설계자인데.
△그 문제는 말하고 싶지 않다.
-경제학자로서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우리나라는 실물과 금융 양쪽 모두 개방도가 매우 높은 국가다. 문재인 정부는 고도화한 개방경제를 망각하고 시장경제를 왜곡시키고 이념을 앞세웠다. 그 결과 정책의 실패, 정부의 실패를 불렀다. 더 큰 문제는 정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시장 실패라고 호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부 개입의 강도를 더 높였다. 이런 거버넌스를 그대로 둔다면 잠재성장률 제고와 일자리 창출, 소득 양극화 등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잘못된 정책을 믿지 못할 통계로 합리화했다.
-신뢰하지 못할 통계는 주택 가격 통계를 말하는가.
△소득 주도 성장이 실패하자 정책을 바꾸지 않고 통계청장을 교체했다. 소득 분배가 되레 악화하자 통계 수장을 교체한 뒤 가계동향조사의 표본과 조사 방식을 바꿨다. 정부는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부동산원(옛 한국감정원) 통계에 근거해 국민이 믿지 못하는 수치를 내세워 주택 가격이 급등한 현실을 왜곡했다. 다분히 의도성이 엿보인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한국부동산원 통계와 KB 통계의 괴리가 너무 심하다. 두 통계의 괴리는 과거에 없었다. 주택 가격이 급등한 노무현 정부 때조차 두 지수의 괴리는 관찰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말부터 상승률 격차가 나타나더니 2020년 하반기부터 급격하게 벌어진다. 최근 1년 동안 상승률 괴리는 3~4배에 이른다. 반면 5대 광역시의 경우 두 지표의 괴리는 현 정부든 과거 정부든 관찰되지 않는다.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을 비교하면 좀 더 분명해진다. 부동산원 지표는 현 정부 들어 네 차례의 표본 보정을 할 때마다 갑자기 뛰어올라 KB 지수와 엇비슷하게 움직인다. 경제학자로서 볼 때 이런 통계 괴리는 있을 수 없다. 정부 통계가 이렇게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정부는 부동산 정책 실패를 가리려 이 통계를 이용했다. 폐쇄 경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감사원 차원에서 그간의 경위를 밝혀야 한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전망한다면 낙관론과 비관론 중 어느 쪽인가.
△저출산 문제 해결에 달려 있다고 본다. 저출산 현상에는 고용과 주택·교육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거의 모든 구조적 문제가 함축돼 있다. 지금까지 저출산 대책은 현금성 지원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2016년)에 따르면 자녀 수는 소득 수준별로 거의 차이가 없고 모든 소득 계층에서 동일하게 하락했다. 이 결과는 금전적 지원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구조 개혁은 표 떨어질까 봐 등한시하고 정치인들은 내일 있을 선거만 보고 재정부터 넣자고 한다. 국가 거버넌스를 복원하고 저출산 현상에 제대로 대처하면 미래가 있겠지만 나는 다소 비관적으로 본다.
-내년 차기 정부가 들어서는 시기는 글로벌 통화 긴축기와 맞물린다.
△우리 경제는 실물경제 규모 면에서는 세계 10위의 선진국으로 인정받지만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여전히 신흥국(이머징마켓) 지위에 머물고 있다. 우리 경제가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비(非)기축통화국의 한계다. 현재 쌓아둔 외환보유고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하지만 이는 위기 때 대외 지급과 금융시장 안정에 필요한 최소 기준이지 위기 발생 위험을 없앨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기축통화국과의 연결고리 확보가 중요하다. 차기 정부는 동맹 외교와 경제외교를 강화해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과의 통화스와프 상설화를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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