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경제의 지속 성장과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더욱 속도감 있게 온실가스 감축과 탄소중립 실현에 나설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2050 탄소중립위원회 전체회의 모두발언에서 “온실가스 감축과 탄소중립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며 탄소중립이 국가경쟁력 제고에 필수라고 강조했다.
반면 통상 전문가들은 선진국들이 사실상 강제하고 있는 ‘탄소중립 행보’에 억지로 발을 맞출 경우, 결국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 전략에 넘어가는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다. 탄소중립이 ‘가야할 길’은 맞지만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전환한 선진국과, 굴뚝산업을 중심으로 부(富)를 쌓고 있는 한국과 같은 중진국의 입장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우리 정부가 탄소감축에 대해서는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은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현재 글로벌 탄소중립 움직임은 선진국의 사다리걷어차기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24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제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1991년 27.6%에서, 지난 2019년 27.5%로 30년새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불리지만 실상은 30년 내리 제조업 강국인 셈이다.
반면 탄소중립을 부르짖고 있는 유럽연합(EU)과 여타 선진국들은 지난 30여년 동안 산업구조 전환을 사실상 마무리 했다. 글로벌 제조 강국으로 불리는 독일의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같은기간 24.8%에서 19.1%로 하락했으며, 금융강국 영국 또한 16.3%에서 8.7%로 낮아졌다. 패션과 관광 부문의 절대강자인 프랑스(15.9%→9.8%)와 이탈리아(19.1%→14.9%) 또한 제조업 의존도가 30년새 대폭 낮아졌다.
여타 선진국 또한 상황이 비슷하다. 미국의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지난 1997년 16.1%에서 지난 2019년 10.9%로 낮아졌으며, 한국과 같이 제조업 비중이 높은 일본 또한 관련 비중이 1994년 23.5%에서 2018년 20.7%로 줄었다. 한국의 제조업 의존도가 선진국 대비 1.5~3배 가량 높은 셈이다. 한국을 포함한 이들 주요국 모두가 2050년 탄소배출량 ‘0’이라는 목표를 향해 똑같이 달려나갈 경우 한국의 피해가 유달리 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규모 탄소배출이 불가피한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움직이고 있다. 국내 채굴 광물의 66%(생산액 기준)를 차지하고 있는 석회석 기반의 시멘트 산업을 비롯해 △초미세 공정 용 불소화합물 사용 등이 많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 △철강 1톤 생산시 1.83톤의 탄소배출이 불가피한 철강산업 △원유 정제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필수인 석유화학산업 등이 국내 대표 산업으로 손곱힌다. 선진국 중에서는 미국과 독일이 석유화학 강국이며 반도체는 미국, 독일, 일본 등이 강국으로 분류된다. 국내 기업들이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관련 기술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하거나, 생산량 감축 등에 나설 경우 이들 선진국의 관련 산업이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전력발전 부문만 보더라도 선진국들은 이미 ‘에너지 전환’ 작업을 수십년째 진행중이라 탄소중립 관련 부담이 덜하다. 미국은 2000년대 초반 셰일가스 채굴 열풍 등으로 석탄 대비 탄소배출이 40%가량 적은 천연가스의 발전 비중을 높였다. 실제 미국 에너지관리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석탄 기반 전력발전량은 지난 2005년 2,012TWh(테라와트시)에서 지난해 773TWh로 15년만에 발전량을 3분의 1로 낮췄다. 반면 천연가스 기반 전력 발전량은 같은 기간 760TWh에서 1,616TWh로, 신재생 에너지 발전량은 358TWh에서 792TWh로 각각 2배이상 늘렸다.
무엇보다 미국의 지난해 신재생 전력 발전량은 미국 전체 발전량(4,009TWh)의 19.8%에 달하며 2050년에는 관련 비중이 42%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여타 선진국 또한 사정이 비슷하다. 풍부한 석탄자원을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발원지가 됐던 영국은 지난해 신재생 발전 비중이 40%에 달할 정도로 에너지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프랑스는 원자력의 전력생산 비중이 전체의 70%에 달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난 2005년 석탄(유연탄)기반 발전량이 124TWh에서 지난해 185TWh로 오히려 1.5배 가량 늘었다. 향후 30년 동안 석탄 발전 감축에 따른 보상 및 대체 에너지원 마련에 천문학적 비용 소모가 불가피한 구조다. 한국의 신재생 기반의 발전량 또한 지난해 22TWh로 전체 발전량의 4.3%에 불과하다. 우리나라가 선진국과 같은 목표치를 내세우고 전력발전부문의 탄소중립 과속에 나설 경우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이 과한 우려가 아닌 셈이다.
이와 관련해 오히려 중국 등 다(多) 탄소배출 국가와 보조를 맞춰 탄소중립 속도조절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중국은 오는 2030년까지 탄소배출을 늘리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탄소중립 달성 시점 또한 여타 국가대비 10년 늦은 2060년으로 설정했다.
중국 외의 중진국들 또한 유엔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평가 보고서’에 자국의 이해관계를 십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며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 전략에 당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세계 3위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보고서에 ‘화석연료 사용을 적극 줄여야 한다’는 내용을 삭제해 달라 요구 중이며, 육가공업이 주력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채식 위주의식단은 온실가스 배출에 유리하다’는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입장이다. 한 한 산업계 관계자는 “선진국 입장에서 글로벌 탄소중립 기조 강화 시 기후변화 리스크 감소라는 주된 효과외에 주요 중진국의 산업경쟁력을 낮출 수 있는 부가적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며 “여타 중진국이 자국 산업 및 에너지 생태계를 고려해 탄소중립 법제화 등에 신중한 반면, 우리나라는 친환경이라는 이상에 취해 ‘묻지마 탄소중립’에 나서는 모습”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