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26일 발표한 가계부채 관리 강화 방안의 핵심은 상환 능력만큼만 빌리는 대출 관행을 정착시킨다는 것이다. 당국은 금융권이 담보·보증을 믿고 대출을 쉽게 내주고 있는 게 가계부채 급증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상환 능력을 평가할 지표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의 차주별 적용을 강화하고 단계별로 시행할 예정이었던 각종 대출 규제를 내년 1월로 앞당겨 시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조치로 고소득자보다 소득이 적은 청년층, 이미 대출을 보유한 저소득층일수록 대출 한도가 급감해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소득’ 방점 찍은 DSR 조기 시행=현재는 전 규제지역의 6억 원을 초과하는 주택을 담보로 주택담보대출을 받거나 1억 원을 초과한 신용대출을 가진 차주만이 은행권에서 차주별 DSR 40%를 적용받았다. 당장 내년부터는 이와 무관하게 총대출액을 기준으로 차주별 DSR 규제를 적용한다. 총대출액이 2억 원을 초과하는 차주는 내년 1월부터, 총대출액이 1억 원을 넘는 차주는 내년 7월부터 DSR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당초 계획보다 각각 6개월, 1년을 앞당겨 도입하는 셈이다. 총대출액이 2억 원을 초과하는 경우는 전체 대출의 51.8%, 1억 원을 초과하는 경우는 77.2%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에는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이 이뤄져 집값이 오르면 대출 한도가 늘어났지만 내년부터는 집값이 올라도 소득이 급격하게 증가하지 않는 한 대출 한도가 늘지 않게 된다.
차주별 DSR을 계산할 때 적용되는 신용대출의 만기도 기존 7년에서 평균 만기인 5년으로 축소했다. 만기가 줄어들면 차주별 DSR 규제 적용 시 추가 대출 한도가 줄어드는 효과를 가진다.
◇카드론·2금융권 대출도 고삐=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의 자금 융통 창구로 자리매김한 카드론·제2금융권에서도 내년부터는 대출받기가 쉽지 않다. 금융 당국이 제2금융권의 차주별 DSR을 기존 60%에서 50%로 하향 조정하기 때문이다. 주로 저신용자가 제2금융권을 이용하고 담보대출에 이용되는 담보가 빌라·주택 등인 점을 고려해 은행권(40%)보다 높은 비율이나 대출 고삐를 현재보다 더 조이겠다는 취지다. 업권별 평균 DSR도 최근 가계부채 증가세를 고려해 규제 비율을 강화했다. 상호금융 160%→110%, 캐피털·저축은행 90%→65%, 보험 70%→50%, 카드는 60%→50%로 강화됐다.
내년 7월부터 차주 단위의 DSR 산정에 적용할 예정이었던 카드론은 내년 1월부터 적용한다. 특히 당국은 카드론의 동반 부실을 차단하기 위해 다중채무자의 경우 카드론 취급을 제한하거나 이용 한도를 제한하는 등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적용할 방침이다. 은행권의 대출 관리 강화로 2금융권에 대출 수요가 몰리면서 가계대출이 급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금융 당국은 주담대·신용대출·전세대출의 분할상환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각종 유인책을 도입한다. 지난해 말 주담대 분할상환 비중은 52.6%로 독일(92.1%), 캐나다(89.1%)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전세대출의 분할상환은 3%대, 신용대출은 11%대로 주담대보다 훨씬 낮다. 당국은 주담대 분활상환 실적을 달성한 금융사에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출연료를 최대 10bp(1bp=0.01%포인트) 우대해주고 전세대출 분할상환을 많이 취급한 금융사에는 정책 모기지를 우선 배정해주는 등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내년부터 대출 한도 ‘뚝’= 금융 당국은 전세대출·중도금대출을 차주별 DSR 산정에서 제외하는 등 실수요자를 위한 조치를 병행해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상환 능력 위주의 대출 규제들이 고소득자보다 소득이 낮은 청년·서민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돼 자산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가계부채 관리 강화 방안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며 “원칙 없는 정책으로 결국 서민들만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A 은행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연 소득 6,000만 원인 차주가 수도권의 6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주담대를 받으려 할 경우 대출 한도가 현재 4억 원에서 내년 1월부터는 2억 7,500만 원으로 줄어든다. 이 차주는 연 금리 4.0%의 신용대출 4,000만 원을 갖고 있고 주담대 상품은 금리 3.3%에 30년 만기, 원리금 균등 상환으로 가정했다. 마이너스통장·주담대 등 총대출액이 2억 원을 넘는 데다 신용대출의 만기가 줄어들면서 한도가 1억 원 이상 감소한 것이다.
내년 1월부터 카드론이 차주별 DSR 규제에 적용됨에 따라 카드론의 대출 한도도 20%가량 줄어들 것으로 관측된다. 가령 연 소득 4,000만 원인 차주가 주담대 1억 8,000만 원, 신용대출 2,500만 원을 갖고 있다. 이 차주가 연 금리 13%, 만기 2년, 원금 균등 상환으로 카드론 800만 원을 신청할 경우 기존에는 800만 원까지 다 나왔지만 내년부터는 636만 원까지만 빌릴 수 있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소득이 적은 차주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신용대출을 어느 정도 끼고 있는데 연 소득 4,000만 원에 신용대출 3,000만 원만 갖고 있어도 대출 가능 금액은 대폭 줄어들게 된다”며 “소득이 적은 사람이 훨씬 영향 클 것”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