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계의 아이돌’ 조성진은 “그가 만진 피아노를 치면 빛이 난다”고 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연주가 끝난 후 직접 문 앞에 나와 손을 잡았다. 거장 백건우는 “한국에서 누구보다 신임하는 조율사”라고 했다. 이 모든 찬사는 한 사람을 향한다. ‘피아노 조율의 마법사’로 불리는 이종열(83·사진) 조율사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2007년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1호 명장 호칭을 부여받은 이 명장은 세종문화회관 호암아트홀, KBS홀을 거쳐 지금은 25년간 예술의전당 전속 조율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속은 아니지만 서울 잠실의 롯데콘서트홀과 서초에 있는 소규모 연주홀 모차르트홀의 피아노도 그의 손길을 받고 있다.
그는 피아노 조율에만 65년을 바쳤다. 그중 공연장에서만 50년을 보냈다. 그동안 이 명장의 손을 거친 피아노는 대략 4만여 대에 달한다. 그만큼의 많은 피아니스트가 그가 조율한 피아노로 연주를 했다는 의미다. 명단에는 클래식계에서 누구나 알 만한 거장들부터 새로 떠오르는 스타까지 이름을 올려놓았다. 지메르만은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 이 명장이 만진 피아노와 처음 대면한 후 그가 조율한 피아노로만 연주한다. 한국이 낳은 피아노의 거장 백건우, 10년 넘게 내한 공연을 했던 조지 윈스턴, ‘피아노의 황제’ 예브게니 키신, 조성진 등도 엄지를 치켜세운다. 비록 그가 목에 메달을 건 적은 없지만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는 ‘형태 없는 금메달리스트’라고 자부하는 이유다.
그는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았다. 시작부터 모든 것을 독학으로 이뤄냈다. 처음 조율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렸을 때 풍금을 처음 접하면서부터. 이 명장은 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서울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어릴 적 교회에서 풍금 소리를 듣고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이 조율사의 길을 걷게 된 출발점”이라고 회고했다.
수리 업자를 찾아가 고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알아내기로 결심하고 피아노 조율과 관련한 일본 서적을 구해 공부했고 그제서야 조율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우쳤다.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서울에 올라와 수도피아노에 취직한 후 삼익악기에 스카웃됐다. 이후 ‘정말 피아노를 잘 만지는 조율사가 있더라’는 학생들의 입소문을 타고 호암아트홀에 입성했다. ‘명장 조율사’의 출발이었다.
거장들에게 인정받고 ‘최고’라는 수식어를 얻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연주자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구 사항도 모두 다르다. 그가 “조율사는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이라고 고백한 이유다. 그는 “건반이 약간 저항하는 듯한 느낌이 나도록 해달라고 하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키신 같은 피아니스트는 ‘고음에서 좀 밝은 소리가 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한다”며 “조율사는 구름 잡는 얘기를 듣고도 바로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율사도 피아노를 칠 줄 알아야 한다는 이 명장의 지론이 나온 배경이다.
조율이 무엇인지 물었다. 곧바로 ‘민주주의’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율은 타협입니다. 하나의 음이 위치를 결정할 때 다른 음들에게 ‘나 여기에 있어도 되느냐’고 묻고 모든 음들이 ‘OK’라고 답하는 과정이죠. 한쪽 소리만 크면 다른 쪽에서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고르게 역할을 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민주주의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율사는 청력이 좋아야 한다. 보청기를 껴서도 안 된다. 생음(生音)을 듣고 다른 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명장은 요즘도 청력 테스트를 하면 1만 7,000㎐까지 나온다. 10~20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70대 이상이 보통 1만 1,000㎐ 이하인 점을 감안하면 매우 양호한 수준이다. 청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요소는 모두 차단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술·담배는 물론 스포츠 경기장처럼 사람 많은 곳에도 가지 않는다. 프로야구를 본 것도 딱 한 번, 그것도 중간에 나와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것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껴서다. 명장은 결코 그냥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