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장비 회사 도쿄일렉트론(TEL)이 국내 연구개발(R&D) 인프라 증설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다. TEL은 반도체 핵심 전(前)공정에 필요한 장비를 만드는 회사로 네덜란드 ASML,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등과 함께 세계 4대 반도체 장비 회사로 꼽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양대 반도체 기업의 첨단 반도체 공정 연구 개발을 측면 지원 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로 해석된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TEL은 국내 보유 중인 R&D 인프라를 대폭 개선하기 위해 1,0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투자는 TEL이 기존 국내에 확보하고 있었던 경기 동탄·발안 연구 기지를 증축, 장비를 개발하고 테스트할 수 있는 클린룸 규모를 확대하는 데 활용될 예정이다. 증설 완료 시점은 2023년으로 예상된다.
TEL은 업그레이드한 R&D 인프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차세대 메모리, 파운드리(칩 위탁생산) 라인에 활용할 수 있는 장비를 국내 고객사 요구 사항에 맞춰 공동 개발한다.
이미 TEL 한국 법인은 2006년 창립 이래 1,300억원을 투자해 국내 총 7군데 7만5,000㎡(약 2만5,000평) 규모 거점을 확보한 바 있다. 꾸준한 국내 반도체 투자와 인력 채용 등으로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하는 ‘2021 외국 기업의 날 행사’에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투자는 약 15년 간 국내에 해왔던 설비 투자 금액과 맞먹는 금액을 한 번에 쏟아붓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 기존 시설을 완전히 새로운 반도체 R&D 기지로 탈바꿈해 국내 고객사와 공고한 협력 관계를 다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TEL은 네덜란드 ASML,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등과 함께 굴지 반도체 장비 업체 중 하나로 꼽힌다. 한 해동안 벌어 들이는 매출만 약 1조4,000억엔(14조5,000억원)이다. 기술도 독보적이다. 첨단 반도체 기술인 극자외선(EUV) 공정용 트랙 장비 분야에서는 세계 90% 이상의 압도적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또 각종 반도체 칩을 만드는 핵심 전(前)공정 라인에 설치되는 대당 수십 억 원의 고급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이 장비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핵심 반도체 라인에도 공급된다.
업계는 고급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TEL의 가파른 R&D 현지화 작업이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 상당한 파급력을 미칠 것으로 평가한다. TEL의 투자로 고급 반도체 인력 양성, 칩 제조 기업 측면 지원 등이 한층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다소 열악하다고 지적 받았던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가 한층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원제형 TEL코리아 사장은 이번 투자에 대해 “한국의 반도체 기술 발전을 위해 지속 투자를 진행할 것”이라며 “채용 규모도 대폭 확대해 우수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TEL의 파격적인 결정 외에 네덜란드 ASML, 미국 램리서치 등 내로라하는 반도체 업체들도 K반도체 벨트에 새로운 생산과 R&D, 서비스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다.
이들은 GVC의 개념을 넘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첨단 반도체 기업이 있는 한국을 지역가치사슬(RVC)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미중 무역 분쟁 등 대외 위기로 공급망 불안이 심화하면서 핵심 고객사가 있는 한국 내에 전진 기지를 두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韓·美·日·대만 'GVC 가치동맹' 속도..."칩스 포 코리아 전략 짜야"
세계 유수의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잇따라 한국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거머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주요 2개국(G2)의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대만·일본·네덜란드 등 반도체 강국이 중국에 대항해 글로벌 ‘GVC 가치 동맹’을 한층 강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미국이 ‘칩스 포 아메리카’를 내세워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처럼 우리도 ‘칩스 포 코리아’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지난 30년간 글로벌 무역 성장을 이끌었던 글로벌가치사슬(GVC)이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 간 갈등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크게 흔들리면서 글로벌 가치 동맹을 더욱 촘촘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 향하는 글로벌 업체=도쿄일렉트론(TEL) 외에도 지난해와 올해 반도체 소부장 분야에서 수위를 다투는 해외 기업들이 잇따라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반도체 초미세 공정용 장비 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은 경기도 화성시 동탄일반산단 인근 부지를 매입하고 오는 2024년까지 극자외선(EUV)·심자외선(DUV) 노광장비 재제조 센터와 엔지니어 교육 시설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반도체 식각 장비 등을 공급하는 램리서치의 한국 생산 법인인 램리서치매뉴팩춰링코리아도 화성시 발안공단에 제3공장을 설립했다. 기존 국내 1~2공장 생산 용량의 2배 이상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해 충남 천안에 EUV 노광 장비용 포토레지스트(PR) 생산을 위한 투자를 결정한 미국의 듀폰도 한국 시장의 성장성을 믿고 투자를 결정한 기업 중 하나다. 당시 정부는 듀폰의 투자를 통해 일본 기업에 90% 이상 의존하고 있는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국내에서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점을 강조하며 외투 기업의 투자를 더욱 활성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GVC가 정상 가동하던 수년 전만 하더라도 이 같은 지역 밀착형 거점 마련의 필요성은 높지 않았다. 자유로운 이동과 원활한 물류 시스템이 보장만 된다면 굳이 코앞에 기반 시설을 두지 않더라도 글로벌 고객사들과 손쉽게 협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G2 갈등은 동맹국과 비동맹국 간에 큰 장벽을 쌓아올렸고 미증유의 팬데믹은 기업들에 리스크 대응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이에 따라 외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이 빠르게 이뤄지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일본·대만·네덜란드 등으로 맺어진 글로벌 반도체 가치 동맹이 향후 중국과의 반도체 패권 다툼에서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가 향후 반도체 업계의 관전 포인트다.
◇반도체 K벨트 강화 인센티브 절실=가치 동맹 강화는 한국에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제조와 연구개발(R&D) 기반 확대는 관련 산업 생태계를 두텁게 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물론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도 상당하다.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코로나19, 미중 갈등으로 불거진 통상 문제 등에도 한층 용이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 번 한국에 발을 들인 해외 소부장 기업들이 실망하고 떠나지 않도록 정부가 정책적인 지원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칩스 포 아메리카’를 내세워 자국 기업인 인텔의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TSMC도 수혜 대상으로 품었다.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에 짓는 TSMC 신공장에 투입되는 1조 엔 가운데 5,000억 엔(약 5조 원)을 세금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달 26일 ‘새로운 자본주의의 실현’을 자국 경제를 위한 철학으로 밝히며 동시에 첨단 반도체 기업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과 제도 정비를 약속했다. 당시 기시다 총리는 “대만 기업의 일본 진출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불가결성과 자율성을 향상시켜 안보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따라서 한국 역시 반도체 생태계를 고도화할 수 있는 기업에 대한 화끈한 세제 지원, 해외 기업을 유인할 수 있는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도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국내 공급망 강화는 외교 갈등 같은 사업 외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반도체특별법 등으로 국내 진출 기업들에 더 강한 인센티브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