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경제]"WTO를 지켜주세요".. '양치기소년' 中의 외침

시진핑 주석,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 강조
중국은 보조금·무역보복으로 WTO 붕괴시킨 장본인
미국의 다자압박 속 중국 되레 'WTO 수호자' 자처
무역의존도 압도적으로 높은 한국의 고민 커져




“진정한 다자주의를 실천하고, 대항 대신 대화하고 배척 대신 포용하며, 관계 단절 대신 융합을 해서 세계무역기구(WTO)를 핵심으로 하는 다자무역 체제를 견고히 수호할 것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달 12일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개방은 아·태지역 협력의 생명선”이라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다만 이 같은 시주석의 발언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중국은 자국기업 육성을 위한 무차별 보조금 지급과 해외 제품에 대한 일방적 관세 부과 및 투자 제한, 희토류 수출 금지와 같은 일방적 무역보복 조치 등으로 ‘WTO 체제 붕괴’를 촉발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시 주석의 발언은 현재 글로벌 통상 상황과 관련이 깊습니다. 시 주석이 ‘WTO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설만큼 글로벌 형세는 중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화웨이 제품 수입 금지 등으로 중국과 정면 격돌한 반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유럽연합(EU) 및 일본·호주 등의 동맹국과 다자 외교를 바탕으로 보다 촘촘한 ‘중국 포위망’을 완성해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순한맛 대통령’인 줄 알았던 바이든이 알고보니 트럼프 전 대통령 보다 훨씬 ‘매운맛 대통령’으로 자리매김 하며 중국을 압박중입니다.


최근 중국이 취한 ‘요소 수출 제한’ 조치 또한 포위망 와해를 겨냥한 중국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WTO 체제 붕괴를 촉진시켜 중국을 더 옥죌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중국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던 전략에서, 탈(脫)중국을 통해 ‘가격안정화’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공급망 재편을 준비중이며 여타 국가들도 비슷하게 공급망 재편 작업을 진행중입니다. 다만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 의존도가 여타 국가 대비 절대적으로 높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이 같은 WTO 체제 붕괴가 경제성장률 감소 등 부작용이 만만찮을 전망입니다.


20일 통상업계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 지난달 말 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자유무역 복원과 글로벌 공급망 안정을 위해 WTO 개혁을 강화해야 한다”며 “지속가능 성장을 위해 개방적이고 공정한 규칙에 기반한 글로벌 교역체제가 지속되고 더욱 발전돼야 할 것”이라며 자유무역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자유무역이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글로벌 규약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지난 2019년 63.33%로 중국(32.05%), 일본(28.17%), 호주(30.44%)에 비해 2배 이상 높으며 글로벌 통상 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19.32%)과 비교해서는 3배 이상입니다. 글로벌 자유무역이 위축될 경우 내수시장이 어느정도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여타 국가 대비 한국이 입을 피해가 상당한 셈입니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한층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으로 WTO 는 갈수록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대만 TSMC의 파운드리(반도체위탁생산) 공장의 자국내 유치를 위해 전체 투자비 8,000억엔(약 8조2,600억원)의 절반인 4,000억엔을 지원한다고 밝히는 등 반도체 공급망 내재화에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자유무역 기조를 왜곡할 수 있는 보조금 지급으로 WTO 규칙 위반논란이 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일본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미국은 국가안보 위협 시 외국산 제품의 수입을 긴급 제한하거나 고율의 관세를 매길 수 있도록 한 무역확장법 232조를 활용해 ‘중국 포위망’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단행된 EU 수입산 철강에 25%의 관세 부과 결정을 철회했으며, 관세 부과 면제 대신 수출량 제한 쿼터를 받고 있는 한국에도 이를 빌미로 ‘우리 편에 서라’는 신호를 노골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무역확장법 232조가 규정한 ‘국가안보 위협’에 대한 부분이 자의적으로 해석 가능한만큼 WTO 규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지만 미국은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국제 사회에서 큰 소리를 못내던 중진국들 또한이제는 WTO를 무시하는 모습이다. 세계 팜유 생산의 55% 가량을 차지하는 인도네시아는, 팜유를 화장품 같은 파생품으로 가공한 뒤 팔기 위해 팜유 수출 중단을 검토중입니다. 이 또한 WTO 규정 위반이지만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WTO에 제소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천연자원을 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WTO는 분쟁 해결 기능은 사실상 2년여전부터 마비된 상태입니다. WTO의 분쟁 해결 절차에서 대법원 역할을 하는 상소 기구의 상소 위원 공석 사태가 미국의 계속되는 보이콧으로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캐서린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달 WTO 본부를 방문해 “WTO의 분쟁 해결 과정은 오래 걸리고 비싸며 논란이 많은 소송과 동의어가 됐다”며 WTO 개혁을 주문하기도 했스니다.


이 같은 WTO의 역할 축소에 대응해 우리 정부는 지난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가입에 이어 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CPTPP) 추진 등에 나서고 있지만 보다 적극적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WTO가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계속해서 변화하는 무역환경에 맞춰 신규 무역규범도 만들고 무역 분쟁 발생 시 해당 규범에 기초해 조치를 취하는 등의 행동을 해야 하는데 이 두가지 모두가 사실상 중단돼 있다”며 “결국 WTO 체제가 무너지면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따라 통상질서가 운영되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결국 디지털을 중심으로 미국이나 대만과 같은 디지털 강국과 손잡고 디지털 통상 연합을 만드는 식으로 미래 통상 질서에 일조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여러 나라들이 공동으로 협정을 맺는 방식이 글로벌 통상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지역별 통상 협정에 빠르게 가입해 ‘우군’을 늘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최근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면서 안정적 물가 상승 속에서도 높은 경제성장률 달성이 가능했던 이른바 ‘골디락스 경제’의 시대가 끝났다는 분석이 제기되는 만큼,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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