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섭씨 36도의 타는 듯한 더위 속에 도쿄 올림픽 여자 골프 2라운드를 마친 고진영(26)은 “앞에 치고 나간 선수가 마침 넬리이기 때문에 더 추격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것 같다”고 했다. 고진영은 100주 동안 지켰던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넬리 코르다(23·미국)에게 뺏긴 뒤 올림픽에 나섰다. 퍼트가 끝내 따라주지 않아 코르다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7타 차 공동 9위로 돌아선 고진영은 “넬리가 워낙 견고했다. 저도 근성이 더 올라오는 계기가 됐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3개월여 뒤인 11월 22일 미국 플로리다주 티뷰론GC(파72).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을 마친 코르다는 “솔직히 오늘은 ‘고진영 쇼’였다. (같은 조에서) 그저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고 패배를 인정했다.
코르다, 하타오카 나사(일본), 셀린 부티에(프랑스)와 공동 선두였던 고진영은 이날 4라운드에서 버디만 9개로 9언더파 63타를 쳤다. 5월부터 안 좋았던 왼쪽 손목 상태가 이번 대회 들어 악화해 정상적인 경기가 어려웠는데도 고진영은 마지막 날 개인 최소타를 쳤다. 최종 합계 23언더파 265타로 대회 2연패를 달성하면서 올해의 선수(211점)와 상금왕(약 350만 2,000달러)을 역전 수상했다. 세계 랭킹 1위 탈환도 기대된다. 올해의 선수 2회 수상(2019·2021년)과 상금왕 3연패 모두 한국 선수 최초 기록이다. 고진영은 통산 12승으로 한국 선수 최다승 공동 3위(김세영)로도 올라섰다. 25승의 박세리가 1위, 21승의 박인비가 2위다.
시즌 5승으로 다승도 1위인데 7월부터 9개 대회에서 5승을 쓸어 담았다. 승률로 따지면 무려 55.5%다. 스스로 ‘골프 사춘기’였다고 진단한 전반기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시즌 초반 컷 탈락과 우승 가뭄, 조모상 후유증 등으로 살짝 흔들리나 싶던 고진영은 올림픽 이후 첫 출전 대회부터 우승하며 이름값을 되찾았다. 한국 선수의 LPGA 투어 통산 197~201승이 모두 고진영의 손에서 나왔다. 한 시즌 5승은 2016년 에리야 쭈타누깐(태국) 이후 5년 만의 기록이며 14라운드 연속 60대 타수를 적어 이 부문 타이 기록도 남겼다.
전날 7연속 버디로 우승 발판을 마련한 고진영은 이날도 전반 9홀에 똑같이 6타를 줄이며 치고 나갔다. 이때 이미 코르다와의 거리는 4타 차로 벌어져 있었다. 10번 홀(파4)에서 90㎝ 버디 퍼트를 놓쳐 하타오카에게 2타 차로 쫓기기도 했지만 고진영은 11번 홀(파4)에서 9m 버디를 넣어 위기를 걷어찼다. 2타 차로 맞은 18번 홀(파4)에서 하타오카에게 버디를 내줬지만 고진영은 안전하게 파를 지킨 뒤 양팔을 하늘로 뻗었다. 이 대회 우승 상금은 여자 골프 대회 사상 가장 큰 150만 달러다. 고진영은 1라운드 9번 홀부터 63홀 연속으로 그린을 놓치지 않는 ‘미친’ 샷 감을 뽐냈다.
하타오카가 22언더파로 1타 차 2위, 3타를 줄이는 데 그친 코르다는 17언더파 공동 5위로 마쳤다. 코르다는 고진영의 자리였던 올해의 선수·상금 부문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전인지는 15언더파 공동 9위, 김세영·유소연·이정은은 13언더파 공동 15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