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녀도’로 뮤지컬 애니메이션에 도전한 안재훈 감독./사진제공=연필로명상하기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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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은 생명을 상징한다. 때로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혁명을, 피를 흘려 쟁취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붉은 색이라고 해서 늘 생명력과 역동성이 넘치는 건 아니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1903~1970)의 붓 끝에서 탄생한 붉은 색이 그렇다. 로스코의 붉은 색 앞에 서면 관객들은 처음엔 생명을 보지만, 이내 그 붉은 색 너머 죽음을 감지하고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지곤 한다. 애니메이션 감독 안재훈 역시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직업적 도전 의식도 느꼈다. 강렬한 붉은 색이 무채색보다도 더 아프고, 더 슬플 수 있음을 스크린을 통해 증명하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지난 24일 개봉한 뮤지컬 애니메이션 ‘무녀도’다.
안 감독은 영화 개봉에 맞춰 서울 중구에 위치한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로스코가 그림을 그리던 당시 마음이 어땠을 지 알고 싶기도 하고, 계속 영감을 받고 싶어 작업하는 동안 계속 로스코 그림을 들여다봤다”며 “스태프들에게도 붓질을 깔끔하게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로스코 그림의 처연한 느낌, 괜히 눈물이 나오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뮤지컬 애니메이션 ‘무녀도’ 스틸컷./사진제공=연필로명상하기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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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도’는 김동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애니메이션화 한 작품이다. 주인공 무녀 모화는 늘 새빨간 입술을 하고, 선홍색 무녀복을 입고 굿을 하지만 모화의 낯빛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산 자의 안녕을 위해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게 그녀의 직업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무녀도의 시대적 배경인 1920~1930년대는 외래 문물에 토속 신앙이 밀리기 시작하던 때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들 욱이 뿐 아니라 그간 모화의 영험함에 의지했던 공동체 역시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마치 금방 칼날에 베인 살갗 사이에서 배어 나온 피 마냥 붉은 색으로 상징 됐던 모화는 끝내 죽음을 선택한다.
‘무녀도’는 색 뿐 아니라 선(線)도 이전 작품에 비해 훨씬 날 선 느낌이다. 안 감독은 “원작의 센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이전 작품보다 훨씬 날카로운 선으로 캐릭터들을 표현해 냈다”고 설명했다.
| ‘무녀도’에서 모화와 욱이의 목소리·노래 연기를 한 뮤지컬 배우 소냐와 김다현./사진제공=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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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원작이 강렬하다고 해서 애니메이션의 모든 요소를 ‘세게’ 갖고 갈 수 는 없는 법이다. 관객이 부담스러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화 차원에서 선택한 시도가 바로 음악 비중 확대다. 주요 등장인물인 모화와 욱이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노래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안 감독은 “뮤지컬 형식을 취하면 원작의 센 느낌이 자연스레 해소되면서 스크린이 더 꽉 차는 느낌이 들 거라 생각했다”며 “또한 모화의 대사 중 상당 부분이 무속에 관련된 내용이라 이해가 어려울 수 있는데, 노래를 통해 전달하면 관객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 뮤지컬 애니메이션 ‘무녀도’ 스틸컷./사진제공=연필로명상하기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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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안 감독은 ‘무녀도’를 끝으로 그간 진행했던 ‘한국 단편문학 프로젝트’에 마침표를 찍었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소나기(2017)’ 그리고 ‘무녀도’까지 잊혀 가던 한국 문학의 아름다움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 해왔던 안 감독은 “젊은 스태프들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스태프들에게도 ‘그들의 시대’가 있어요. 감독으로서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살 수 있게 해줘야죠. 젊은 스태프들이 재미있어 하고, 자신의 재능을 도구 삼아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분야가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는 이전 시대 보다는 지금 시대, 미래 시대를 보여주는 작품을 내놓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