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술꾼 도시 여자들' 정은지, 아이돌 금기를 부수다

'술꾼 도시 여자들' 정은지 / 사진=IST엔터테인먼트 제공

10대 때 그룹 에이핑크의 메인 보컬로 데뷔한 정은지. 20대의 끝자락에서 만난 '술꾼 도시 여자들'은 터닝 포인트가 되기 충분했다. 거침없는 욕설은 물론 술, 담배까지 아이돌 금기 사항을 깨부수며 폭넓은 경험치를 쌓았다.


지난달 26일 종영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술꾼 도시 여자들'(극본 위소영/연출 김정식/이하 '술도녀')은 하루 끝의 술 한 잔이 인생의 신념인 세 여자의 일상을 그린 본격 기승전'술' 드라마로, 웹툰 '술꾼 도시 처녀들'을 원작으로 한다. '술도녀'는 티빙 유료 가입자 수를 증폭에 기여하며 인기리에 종영했다. 작품 5, 6회가 공개된 후 티빙의 유료 가입 수치는 전주 대비 178% 상승했고, 7, 8회가 공개된 후에는 전주 대비 3배 이상 올랐다. 그야말로 티빙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정은지는 과거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안정적인 길을 걸었으나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사표를 내고 BJ 길로 접어든 지구 역을 맡아 인기 견인에 한몫을 했다.


"인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해 얼떨떨해요. 그래도 주변에서 정말 재밌어해 주니까 즐거움은 커요. 지인들이 보내는 문자에 웃음이 많이 올수록 희열감이 크더라고요. '응답하라 1997'을 함께한 신원호 감독님도 '하길 잘했다'고 칭찬해줘서 행복했어요. 작품을 찍을 때도 보는 사람이 재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정말 재밌다고 하니 통한 기분이에요."


"에이핑크 멤버들도 응원해 줬죠. 사실 대화의 목적은 저를 놀리는 거겠지만요. 그래도 멤버들이 '난리 났다'고 해주니까 부끄러우면서 '이번 드라마를 정말 많이 봤구나' 느꼈어요. 아무래도 OTT 플랫폼이다 보니 시청률이 보이지 않아서 가늠할 수 없었는데, 멤버들의 응원과 반응이 힘이 돼요. 티빙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는 기사도 뿌듯합니다."



'술꾼 도시 여자들' 정은지 / 사진=티빙 제공


처음 대본을 받은 정은지는 술술 넘어가는 작품에 매료돼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읽었다고. 원작 웹툰을 재밌게 본 정은지에게 지구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지구와 만난 정은지는 과거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로 딱딱한 벽을 만들고 그 안에 숨은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상처가 많거나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인물들은 방어 기제가 강하기 마련이죠. 지구의 어머니는 자신의 욕심대로 지구의 인생을 설계하고 이를 강요했어요. 결국 집을 뛰쳐나와 7년간 가족과의 연을 끊는데, 보통 모녀 사이의 일은 아니잖아요. 지구가 자식으로서 받은 상처를 먼저 생각하고, 그 이후의 성격을 그리려고 했어요."


"지구의 이야기와 감정이 진행될수록 부담감도 컸죠. 정말 많이 이해하고 찍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감정의 후폭풍도 밀려오더라고요. 감정이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갔다가 마치 절벽에서 민 것처럼 확 떨어졌어요. 이럴 때는 그냥 나만의 공간인 집에서 울었어요. 눈물을 참으려는 생각조차 안 한 것 같아요."


가족 서사를 뺀다면 정은지와 지구의 닮은 점은 꽤 많은 편이다. 중저음의 목소리 톤도 평소 정은지의 것이고, 말없이 챙겨주는 성격도 비슷하다. 정은지는 친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 모습은 비슷한 게 많다며 "쓴소리를 많이 하는 편인데, 알게 모르게 다정한 순간들도 있다"고 말했다. 팬들이 츤데레 같은 정은지와 지구의 모습을 비교한 것을 보고 공감하기도 했다.


지구는 항상 친구들을 기다리는 역할이다. 소희(이선빈)와 지연(한선화)이 연애를 시작하면 홀로 술을 마시거나,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 정은지는 촬영하면서 이런 지구의 인내심을 배웠다. 또 묵묵히 친구들을 위로하는 지구를 보면서 진정한 위로의 의미도 되뇌었다. 그는 "소희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지구가 옆에서 위로를 건네는 장면에서 거창한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단지 옆에 있어 주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쩌면 이런 게 진짜 위로가 아닐까' 생각했다"며 "어떤 상황이 닥치든 지구 같은 친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작품의 목표는 시청자들이 지구, 소희, 지연의 가족보다 진한 우정을 보고 공감하는 것이었다. 정은지는 실제로도 한선화, 이선빈과 급속도로 친해져 자연스러운 케미가 나왔다고. 애초에 좋은 사람들이라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가까워졌다며 미소를 띄었다.


"한선화, 이선빈과는 금방 친해졌는데, 오히려 최시원(강북구 역)이 제일 어려웠어요. 엄청 대선배님이기도 하고,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어느 친구의 필통에 붙어 있던 분이에요. 우리 반 절반이 엘프(슈퍼주니어 팬덤명)여서 그런지 연예인 같고 어려운 느낌이 있었죠. 특히 부리부리한 인상이라 말을 안 하면 과묵할 것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처음 합을 맞췄는데, 선배님이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결국 처음부터 선 긋는 건 나였나 싶어요."




지구는 톤 다운된 캐릭터로 차분하고 묵묵하며 정제된 모습이다. 반면 소희와 지연은 극강의 텐션을 보여준다. 정반대되는 캐릭터들이 각기 다른 감정으로 신을 끌고 가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은지는 이런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 캐릭터를 적립하기 위해 지구 만의 애드리브를 만들었다.


"지구만의 똘끼를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래서 지구가 일상적으로 할 만한 표현을 연구했죠. 포장마차 신에서 강북구에게 작게 욕을 하는 것도 다 애드리브예요. 애드리브가 워낙 많아서 '보는 사람들도 재밌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현장에 있는 감독님도 진지하게 찍다가 웃을 정도였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애드리브가 캐릭터스럽게 나왔는데 뿌듯하더라고요. 반응이 좋으니 애드리브를 고민하는 일련의 과정이 꽤 재밌었어요."


술과 욕은 아이돌에게 금기되는 소재다. 담배를 피우는 지구는 현역 아이돌인 정은지에게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정은지는 성인이기에 부담감은 없었다며, 30대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도전해 볼 만했다고 자평했다. 지구의 걸쭉한 욕은 작품의 진정성을 더하는 장치로 사용됐고, 호평을 얻었다. 그는 인간 정은지가 아닌, 지구를 앞세워서 사람들이 많은 데서 큰 소리로 욕을 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꼈다고.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지연과 소리를 지르고 욕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도 감정이 들끓었다.


"카메라 앞에서 제가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낯설긴 했어요. 스태프들이 '쟤가 어떻게 담배를 피우는지 보자'는 눈빛으로 절 쳐다봤으니까요. 순간적으로 팬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이미 '응답하라 1997'로 면역을 키운 것 같더라고요. 다행히 지구 자체로 봐줘서 감사한 마음이죠. 오히려 부모님이 걱정됐어요. 딸이 담배를 피우는 신을 보고 어떤 리액션이 나올까 싶어서 '소품용으로 금연초를 주니 걱정 말라'고 사전에 말했어요. 이후 동생이 제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부모님이 얼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아마 복잡한 마음이셨을 거예요"(웃음)




높아진 인기만큼 '술도녀'의 시즌2를 염원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시즌2는 긍정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상황. 정은지 역시 시즌2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선 대본이 제일 궁금해요. 워낙 시즌1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해요. 아직은 시즌1이 잘 된 걸 즐기려고 합니다. 그래도 시즌2를 생각하자면, 지구가 지금까지 그려왔던 것에 벗어나지 않고 여러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와의 이야기도 더 풀었으면 하는데 그때도 많은 분들이 재밌어하셨으면 해요. 마지막 회에 지구를 지켜보던 '친절한 종이씨'의 정체가 윤시윤으로 밝혀졌잖아요. 사실 '친절한 종이씨'의 정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딱 집중하고 윤시윤을 상상하고 거기에 맞게 리액션을 하려고 노력했죠. 시즌2에서 또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술도녀'로 인생 캐릭터를 경신한 정은지의 터닝 포인트는 지금이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를 맞은 정은지는 "'응답하라 1997'로 오랫동안 기억됐는데, 그간의 경험치가 쌓여서 지구를 만난 것 같다. 지구를 만난 지금부터 또 경험치를 쌓는다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 같다"고 말했다. 20대를 '술도녀'로 마무리하게 된 그는 30대에 접어들며 넓어질 경험의 폭과 깊이를 기대한다.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목표로 다채로운 캐릭터를 만나길 바란다는 마음이다.


"30대에는 인간적으로는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고, 제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