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아찔·짜릿·서늘…용의 승천길을 걷는다

◆순창 용궐산·채계산
'용이 사는 거처' 용궐산 암벽에 데크길
지그재그 530m 낭떠러지 곡예에 아찔
정상 오르니 능선·섬진강 어우러져 탄성
채계산 '기둥 없는' 270m 출렁다리에선
바람 불때마다 휘청휘청 심장이 덜컹덜컹
1억년 물살이 빚은 요강바위엔 신비함이

전북 순창 용궐산 암봉에 지그재그로 난 잔도 ‘하늘길(530m)’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이 길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로 지금껏 인간이 한 번도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요즘 한국 여행의 중심은 산이나 호수 위에 놓인 다리다. 지난 10년간 출렁다리부터 울렁다리·흔들다리·구름다리·잔도까지 전국 각지에 놓인 다리 수만 100여 개. 그야말로 다리 전성시대다. 지난 2년 새에만 ‘국내 최장 출렁다리’ 타이틀의 주인공이 세 번이나 뒤바뀔 정도로 경쟁도 치열하다. 길이로 시작된 다리 경쟁이 짜릿함으로 옮겨붙어 지방자치단체들은 점점 더 높고 스릴 넘치는 다리를 앞다퉈 선보이고 있다.


전북 순창은 다리 경쟁의 중심에 서 있는 대표 도시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 국내 최장 산악용 출렁다리에 이어 올해는 암벽 위에 사다리처럼 걸쳐 놓은 잔도(棧道)까지 잇따라 개통하며 단숨에 전국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다리 위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100년 넘게 발길이 이어지던 등산 코스는 물론 지역 명소의 순위까지 바꿔놓고 있다. 순창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던 고추장마저 잊게 할 만큼 하나같이 매력적인 곳들이다.



채계산 출렁다리는 발밑으로 지나가는 차량이 장난감으로 보일 정도로 높은 또 다른 하늘길이다. 다리 위에 서면 멀리 섬진강과 적성 들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길이보다 아찔함이 더 매력인 다리


채계산은 순창 적성면과 남원 대강면 일원에 자리하고 있는 해발 342m의 나지막한 산이다. 섬진강변에서 바라보면 마치 비녀를 꽂은 여인을 닮았다고 해서 채계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밖에도 바위가 책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책여산, 적성강(섬진강)을 품고 있어 적성산, 화산 옹바위 전설의 무대인 화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순창에서는 화문산·강천산과 함께 3대 명산으로 꼽힌다지만 출렁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지금과 비교하기도 어려울 만큼 평범한 산에 불과했다.


출렁다리는 24번 국도로 갈라진 적성 채계산과 동계 채계산 두 산을 연결한다. 다리 길이는 270m, 최고 높이는 90m다. 울산 대왕암공원 출렁다리(303m)에 이어 예산의 예당호 출렁다리(402m), 논산의 탑정호 출렁다리(600m)가 잇따라 개통되면서 최장 출렁다리라는 타이틀은 빼앗겼지만 다리 기둥이 없는 무주탑 산악 현수교 중에서는 여전히 가장 길다. 채계산 출렁다리는 지난해 3월 개통해 연말까지 9개월간 60만 명이 넘게 다녀갔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채계산 출렁다리의 인기 비결은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다. 사람 한 명만 지나가도 출렁거리는 다리 위에서 바람까지 불어대면 좌우로 심하게 휘청거려 간담이 서늘해진다. 발아래로 지나가는 장난감 크기의 차량들과 사방으로 뻥 뚫린 시야도 긴장감을 더한다. 무서움을 떨쳐내고 멀리 시야를 돌리면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고, 그 주변으로 드넓은 적성 들녘이 펼쳐진다. 산 정상에 올라서도 볼 수 없던 풍경들이다.


채계산 등반은 산행보다 출렁다리를 건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수직에 가까운 나무 계단 538개를 오르면 출렁다리 입구다. 주차장에서부터 다리를 건너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 남짓.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막상 다리 위에 서면 힘들게 오른 보상으로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체력에 여유가 있다면 다리 건너 정상 송대봉까지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



‘용궐산 하늘길’에 닿으려면 산길을 30여 분 올라야 한다. 하늘길은 섬진강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장군목을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이 오를 수 없던 곳…이름이 바뀌자 풍경도 바뀌었다


채계산에서 15분 거리에는 ‘용궐산 하늘길’이 있다. 용궐산(645m)은 산악인들에게 ‘용골산(龍骨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죽은 ‘용의 뼈’라는 의미가 부정적이라며 산 이름을 바꿔 달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2009년 ‘뼈 골(骨)’ 자를 ‘대궐 궐(闕)’ 자로 바꿔 용궐산(龍闕山)이 됐다. 용이 사는 거처라는 뜻이다.


이름이 바뀐 뒤부터 산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다리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잔도 ‘용궐산 하늘길’이 놓인 덕분이다. 잔도는 산악지대를 통과하기 위해 벼랑에 선반을 매달아 놓듯 만든 다리다. 들머리는 섬진강변에 자리한 ‘용궐산 치유의 숲 주차장’. 머리 위로는 거대한 암릉이 위용을 드러낸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는 마치 지네가 지나가는 것 같은 잔도가 매달려 있다.


하늘길에 닿으려면 암벽까지 돌계단을 따라 30여 분을 올라야 한다. 이전에는 수직 암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오를 수 없던 곳이다. 암벽에 다가서면 본격적인 하늘길이 이어진다. 수직으로 이어진 체계산 데크 길과 비교하면 지그재그로 난 용궐산 하늘길은 평지나 다름없지만 땅이 아닌 암벽에 쇠기둥을 박고 그 위에 나무 데크를 얹어 만든 절벽길이다.


하늘길 등반은 숲길을 걷는 기존 산행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하늘길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낭떠러지 위에 올라선 느낌이 든다. 오금이 저릴 만큼 극심한 공포감을 이겨내고 잔도가 한 번 꺾이는 지점까지 오르고 나면 드디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눈앞으로는 해발 500m 높이의 주변 산 능선과 임실에서 순창을 거쳐 남원·곡성으로 흐르는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늘길은 정상을 향해 스쳐 지나가는 기착지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지다. 정상까지 오르는 것도 좋지만 산이 목적이 아니라면 하늘길까지 갔다가 돌아와도 아쉬울 게 없다. 용궐산 정상까지는 하늘길 530m를 포함해 총 3.5㎞, 1시간 30분 거리다. 정상에 들렀다가 어치계곡을 따라 옛 등산로로 하산하는 코스다.



요강바위는 너럭바위에 난 구멍이 요강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포트홀이라고 불리는 이 물 웅덩이는 거센 물살이 1억 년 이상 흘러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다.

자연이 빚은 예술품…섬진강 명물 ‘요강바위’


하늘길에서 마주하는 물길은 섬진강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장군목 구간이다. 장군목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을 꼽으라면 요강바위다. 용궐산 하늘길에서 내려와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요강바위다. 섬진강 거센 물살로 너럭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인 모양이 마치 요강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렇게 불린다. 평평한 바위 위에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한국전쟁 때 마을 주민들이 요강바위 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요강바위를 특징 짓는 구멍(포트홀)은 돌개구멍으로 빠른 물살이 1억 년 정도 지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장군목 말고도 전국에 여러 포트홀이 존재하지만 유독 요강바위가 유명해진 것은 20여 년 전의 도난 사건 때문이다. 포트홀이 수억 원을 호가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1993년 무게 5톤짜리 요강바위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난된 바위는 경찰에 적발돼 1년 6개월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고, 뉴스를 통해 사건이 알려지면서 요강바위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향가터널은 일제강점기에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일본군이 만든 터널이다. 광복 이후 마을을 오가는 길로 사용되다 2013년 섬진강 자전거길로 조성됐다.

도로에서 이정표를 따라 물가로 내려가면 요강바위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도난당했던 요강바위는 강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무리해서 건너다 물에 빠지는 것보다 주변 바위 위로 올라가서 보는 편이 안전하다. 인근 현수교 위에서는 여러 요강바위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다리 건너편은 섬진강 자전거길 겸 예향천리 마실길이다. 구불구불 물길을 따라 가면 산길, 들길, 산촌 마을까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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