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사전 지정 운용 제도, 즉 ‘디폴트 옵션’ 도입을 골자로 한 가입자퇴직연금보장법 개정안이 지난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에 따라 내년 6~7월에는 디폴트 옵션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입니다.
업계·금융당국 모두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및 개인형퇴직연금(IRP) 장기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환영 의사를 밝혔습니다. 전문가들은 디폴트 옵션 도입이 향후 퇴직연금 투자 풍토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사실상 모든 DC형·IRP 속 노후 자금을 금융 상품에 투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디폴트 옵션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짚어 봤습니다.
디폴트 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따로 투자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사전에 퇴직연금 사업자와 지정한 포트폴리오대로 노후 자금을 굴리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투자자가 ‘방치한 퇴직연금’을 자동으로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겁니다. DC형 퇴직연금과 IRP에 가입한 고객이 대상입니다.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 가입자에겐 적용되지 않습니다.
고객들은 증권사·은행·보험사 등 각 퇴직연금 사업자로부터 디폴트 옵션 자산 배분 현황, 발동 요건 등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어떤 방식으로 디폴트 옵션을 도입할지 결정합니다. 구체적으론 △타깃데이트펀드(TDF) △장기 가치 상승 추구 펀드 △머니마켓펀드(MMF) △인프라 펀드 △원리금 보장 상품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가상으로 A증권사를 통해 DC형 퇴직연금에 가입한 B씨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A증권사는 B씨에게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DF, KB자산운용의 채권형 펀드, 한국투자신탁운용의 MMF, IBK자산운용의 EMP 펀드를 디폴트 옵션으로 권합니다. 즉, B씨가 향후 DC형 퇴직연금에 대해 따로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면, 이들 상품 중 하나를 자동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만약 B씨가 자신의 생애주기에 맞춰 자동으로 자산배분을 하는 상품을 원한다면 TDF를 선택할 것입니다. 각종 자산에 다양하게 투자하는 상품을 원한다면 EMP를 택할 수도 있겠죠.
만약 가입자가 퇴직연금에 든 이후 4주가 지난 이후에도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면 증권사 등에서 “디폴트 옵션으로 운용될 예정”이라고 통지를 하게 됩니다. 통지 이후에도 2주간 운용 지시가 없다면 디폴트 옵션을 적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운용 지시가 없는 경우엔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미래에셋전략배분TDF2050’에 투자한다”고 디폴트 옵션을 맺었다면, 6주 후 자동으로 이 상품에 노후 자금을 넣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디폴트 옵션이 적용된 후에 스스로 퇴직연금 투자를 하고 싶어졌다면, 가입자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원하는 다른 방법으로 운용 지시를 내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미 DC형 퇴직연금이나 IRP에 대해 적극적으로 운용 지시를 내리고 있던 투자자들도 디폴트 옵션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금융사가 좋은 디폴트 옵션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후 대통령령이 나와야 알겠지만, 금융 당국은 각 금융사별 디폴트 옵션 수익률·비용·운용현황 등을 공시할 계획입니다.
디폴트 옵션이 도입된 이유는 퇴직연금이 1~2%대 저조한 수익률을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5년간 국내 퇴직연금의 연환산 수익률은 1.85% 수준에 불과합니다. 미국·호주 등에서 5~7% 수준의 수익률을 보이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저조하다는 지적이 거듭 제기돼왔습니다.
정부·업계에선 이처럼 수익률이 낮은 배경으로 ‘방치된 퇴직연금’을 꼽았습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국내 근로자 중 40% 이상이 상품 운용 지시를 제대로 내리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 쏠림이 심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목돼왔습니다. 퇴직연금 원리금보장형 상품 편입 비중은 지난 9월 기준 86.4%로 지난해 말(89.3%)보다는 소폭 줄었지만 여전히 80%대 수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선 디폴트 옵션을 도입해 퇴직연금 장기 수익률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앞서 미국(2006년), 영국(2008년), 호주(2013년) 등에서 선제적으로 디폴트 옵션을 도입한 후 TDF 등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이 높아졌다는 점이 근거였습니다. 정부에선 지난 2019년 ‘노후 대비 자산 형성 지원 방안’을 발표하며 디폴트 옵션 도입을 공식화했습니다.
업계에선 디폴트 옵션 도입 후 퇴직연금 내에서 실적 배당형 상품으로의 ‘머니 무브’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무영 금융투자협회 산업전략본부장은 “현재 국내에서 10조 원 규모인 TDF 시장은 향후 2~3배 정도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습니다.
연금 관련 상품이 보다 다양하게 출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옵니다. 사실상 모든 DC형 퇴직연금 가입자 및 IRP 계좌 보유자들이 의무적으로 금융 상품을 퇴직연금에 넣을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제도로 인해 ‘수요’가 커진 만큼 자산운용사 등 상품 ‘공급자’들 입장에서도 연금 시장에 맞춘 상품을 적극적으로 출시할 유인이 커진 것입니다.
물론 원금 손실을 꺼리는 투자자들은 예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디폴트 옵션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증권업계에선 디폴트 옵션 상품의 본 취지였던 ‘원리금보장형 상품 쏠림’이 해결되기 어려울 거라는 우려를 내비치기도 합니다. 일본 사례를 대표적인 예시로 듭니다. 일본의 경우엔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면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지로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디폴트 옵션 투자자의 75%가 원리금 보장형으로 운용하면서 사실상의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부에선 내년 상반기 중으로 △디폴트 옵션 심사 원칙 및 기준 △디폴트 옵션 정보 제공 시 준수 사항 △디폴트 옵션 적용 절차 및 공시 방법 등을 규정한 시행령·시행규칙을 제정할 방침입니다. 금융위는 “이번 법률 개정 과정에서 포함되지 않은 일임형·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도 향후 도입될 수 있도록 입법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