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이 있다. 영화 '킹메이커'는 각본 없는 영화였던 1970년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야기와 국내 정치 상황을 스크린에 옮겼다. 교과서에나 볼 법한 장면들이 세련된 연출과 만나 생명력을 얻었다. 여기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신념과 욕망을 표현한 '킹메이커'다.
'킹메이커'(감독 변성현)는 독재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도전하는 정치인 김운범(설경구)과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의 이야기다. 김운범은 열세인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정치인이다. 서창대는 김운범을 당선시키고자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 전략을 펼치고, 덕분에 김운범은 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까지 올라선다. 대통령 당선을 위해 모두가 총력을 기울이던 중 김운범의 자택에서 폭발물이 터지고, 용의자로 서창대가 지목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작품의 외피는 고증이 이뤄진 정치 드라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엄창록이 처음 만난 1961년 강원 인제 보궐 선거를 시작으로 1970년, 김영삼 후보와 경쟁 승리 후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1년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제7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하게 되는 시대 상황이 배경이다. 당시 건물, 소품, 의상 등이 그대로 재현됐다. 또 흑백 TV 속 김운범의 선거 유세와 당 대표를 선정 김운범과 김영호(유재명) 등의 모습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사진을 방불케 한다.
내피로 들어가면 인간 신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옳지 않은 행위가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뇌다. '만약 용인된다면 어느 정도 선까지가 적당한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다. 올바른 정치의 길을 걷고자 했던 김운범은 아직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선거판의 여우'라 불리는 귀재 서창대를 만나면서 승승장구한다. 서창대가 김운범을 위해 정직하고 바른 길로만 유세를 펼친 건 아니다. 서창대는 어느 선까지 네거티브를 사용했고, 뒤에서 방해 공작도 펼친다. 김운범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한다. 이것이 김운범이 생각한 옳지 않은 행위에 대한 적정선이다. 서창대는 그 선을 넘어 김운범과 갈등을 빚는다. 독재 타파와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엄청난 뜻을 품은 김운범의 적정선과 경계선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작품은 '인간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포함한다. 극 초반 서창대가 김운범에게 보낸 애기똥풀은 약이 되면서 독이 되는 꽃이다. 이는 서창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김운범에게 서창대는 선거를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신념을 위협해 독이 된다. 서창대도 마찬가지다. 서창대에게 김운범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선생님이었다가, 자신을 그림자로 만든 인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이었다가 독이 되는 관계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은 공감을 얻기 충분하다.
정반대의 양상을 가진 김운범과 서창대는 빛과 그림자로 점철된다. 서창대는 이북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다. 당시 '빨갱이'라고 취급받던 김운범에겐 감춰야 할 존재인 것. 서창대는 기꺼이 그림자가 돼 어둠 속에서 김운범을 빛내기 위해 노력한다. 빛이 밝아질수록 그림자는 더 어두워지는 법이다. 김운범이 높은 곳으로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수록 서창대는 어두운 욕망에 휩싸인다. 변 감독은 김운범을 밝게 강조하는 대신, 서창대의 어두운 욕망을 짙게 그렸다. 영리하게 서창대를 어둠 속에 가둬 상대적으로 김운범이 빛나 보이는 연출법을 취했다.
변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연출도 돋보인다. 그간 다수의 정치물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려져 소위 '장년층을 위한 장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킹메이커'는 빠른 전개와 세련된 연출이 더해져 한마디로 '힙'하다. 화면 전환은 빠르고 곳곳에 깔린 미장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1970년대를 재현한 세트와 의상도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장년층은 물론, 젊은층까지 동시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설경구와 이선균의 연기는 스크린을 압도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삼은 김운범을 연기한 설경구는 자칫 대통령 성대모사로 변질될 수 있는 상황에서 중심점을 잡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형적인 묘사는 덜고, 뜨거운 정치 신념에 집중했다. 이선균은 다양한 감정의 변주를 통해 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극 초반 김운범을 향한 동경부터 불신과 변모까지 서창대의 서사를 여러 얼굴로 표현했다. 이름만 들어도 존재감이 있는 두 배우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과 진한 브로맨스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