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농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여야 대선 후보의 ‘쌀값 포퓰리즘’ 경쟁이 불붙고 있다. 올해 쌀이 과잉생산되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이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까지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해 정부가 직접 쌀을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1인당 쌀 소비량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 쌀을 매입하면 과잉생산이 고착화할 수 있는 데다 고공 행진 중인 물가 오름세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7일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 2011년 71.2㎏에서 지난해 57.7㎏으로 9년 새 약 19% 감소했다. 이는 통계 조사 이래 역대 최저치로 1990년 쌀 소비량인 119.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록적인 장마·태풍으로 쌀 생산량이 급감했던 지난해를 제외하면 쌀 시장은 매년 약 30만 톤의 재고가 발생하는 구조적 공급과잉 상태다. 올해도 388만 톤의 쌀이 생산돼 예상 수요량(357만~362만 톤)보다 27만~31만 톤의 쌀이 남게 됐다.
그럼에도 여야 대선 후보는 앞다퉈 정부가 쌀 시장 격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장 격리는 수확기 쌀 생산량이 수요량을 초과할 경우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사들여 쌀값 폭락을 막는 제도다. 이 후보는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14일까지 여섯 번이나 쌀 27만 톤 시장 격리를 주장했다. 윤 후보는 한술 더 떠 16일 “정부가 농민의 애타는 심정을 외면하지 말고 쌀 30만 톤을 시장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체 농가의 55%를 차지하는 벼 재배 농가의 민심을 얻으려는 의도다.
정부가 쌀 시장 격리에 나서려면 수천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정부는 2015년 35만 7,000톤의 쌀을 격리할 때 약 6,200억 원, 2016년 29만 9,000톤의 쌀을 격리할 때 약 5,400억 원을 투입했다. 정부가 격리한 물량을 시중에 풀었을 때 거둬들이는 수익이 해당 금액에 미치지 못하면 나머지는 고스란히 혈세로 메워야 한다. 쌀 재고 1만 톤을 관리하는 데만 5억 원이 든다. 이 후보와 윤 후보의 주장대로 약 30만 톤의 쌀을 격리하면 150억 원의 재고관리 비용이 추가로 드는 셈이다.
물가 상승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 쌀값을 올려주면 소비자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우려 요인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7%로 약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9년 만에 2%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 통상 명절 기간에 먹거리 소비가 늘어 물가가 오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설 명절을 1개월가량 앞둔 현시점도 물가를 관리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더구나 5일 기준 산지 쌀값은 20㎏당 5만 2,586원으로 전월(5만 3,643원)보다는 떨어졌지만 이례적인 장마·태풍 등의 영향을 받지 않은 2019년 같은 때(4만 7,534원)나 2018년 같은 때(4만 8,414원)보다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양곡관리법에서 ‘쌀 생산량이 수요량을 3% 이상 초과하거나 수확기 가격이 지난해보다 5% 이상 하락하면 시장 격리가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정부가 미온적인 것은 이 같은 우려 때문이다.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쌀 생산량이 양곡관리법의 시장 격리 요건을 충족하기는 했지만 과잉 수급뿐 아니라 시장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며 “쌀값이 떨어지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오르고 있는 만큼 정부가 시장 상황을 세밀하게 모니터링해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필요한 시기가 되면 즉시 시장 격리에 나설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사후 대책인 시장 격리보다는 구조적인 생산과잉을 해소하기 위한 생산 조정 제도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조정제는 논에 벼 외에 다른 작물을 심거나 휴경하면 소득 감소분의 일부를 보전해주는 제도다. 지금처럼 정부가 돈을 들여 가격을 떠받쳐주는 상황에서는 쌀 공급과잉이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승룡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쌀 생산량이 수요를 일정 비율 초과한 상황에서 시장 격리 조건을 잡는다는 것은 이미 시장에 충격이 가해진 뒤 시행하는 사후 대책에 불과하다”며 “쌀값 안정을 위해서는 생산 조정이 반드시 필요한데 자동 시장 격리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