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하반기,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유례 없이 고조되면서 전 세계에 전쟁 공포가 확산됐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은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연일 수위를 높이며 살벌한 설전을 벌였다. 트럼프는 “전 세계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를 보게 경험하게 될 것”이라면서, 유엔 총회 도중에 김정은을 ‘로켓맨’이라는 조롱 섞인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김정은도 트럼프를 향해 ‘늙다리 미치광이’라는 막말로 맞받아쳤다. 누구도 이듬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분위기가 급변하고, 김정은이 국제정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2018년 이후 남북한과 미국 정상 간 잇단 회동은 한반도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는 듯 보였지만, 지금 남북미 관계는 다시 교착상태다. 트럼프는 자신의 압박이 성공했다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았다.
신간 ‘비커밍 김정은’은 미국 내 ‘김정은 전문가’이자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무부 요직에 앉아 잇는 정 박(한국 이름 박정현)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가 김정은의 세계관과 핵무기에 대한 인식의 근원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2009년부터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정보국(DNI)에서 북한 담당 선임 분석관으로 일하며 김정은 권위자로 평가받은 인물로, 책은 그가 브루킹스연구소에서 한국석좌로 근무하던 작년 4월 미국 현지에서 출간됐다. 미국의 대북정책의 결정에 깊이 관여하는 동아태 부차관보의 저서인 만큼 미국의 대북 인식과 정책 결정을 이해하는 데 여러 모로 힌트가 될 만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책은 CIA 기밀 자료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토대로 김정은의 성장 과정과 지도자 수업부터 비핵화 문제를 둘러싼 정세 판단, 북한 체제에 대한 전망 등을 아우른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회의적이었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도 비판적이었던 저자의 시각은 책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저자는 김정은이 평화보다 갈등, 경제 통합보다 자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자신의 생존과 김씨 일가의 영속을 위해 비핵화가 아닌 핵무기 보유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강조한다. 2018년에 김정은이 보인 대화 행보 역시 벼랑 끝까지 밀어붙였다 방향을 바꾸는 ‘선회’ 전술의 재연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책은 김정은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를 찾고자 스위스 유학시절은 물론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선대의 통치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분석을 시도한다. 저자가 보는 ‘결정적 장면’은 20대 초반 아버지 김정일의 통치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경험이다. 책은 북한이 감행했던 2006년의 첫 핵실험에 대해 “김정은이 집권했을 때 선택의 폭을 좁혔고, 북한과 2,500만 북한 인민의 운명이 이 핵 유산의 보존에 달려 있다는 확신에 그를 가두었다”고 지적한다. 실제 김정은은 집권 초기 6년 간 김일성·김정일 시기를 합친 것보다 세 배 많은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고, 북한이 지금껏 실시한 핵 실험의 3분의 2인 4차례의 실험을 감행했다. 김정은이 후계자에게 물려주려는 독립적이고 강력한 북한의 유산에서 핵무기가 빠지지 않으리라는 게 책의 전망이다.
책은 북한 통치에서 드러나는 김정은의 강경하고 호전적 태도도 분석한다. 자신의 고모부인 ‘로열 패밀리’ 장성택을 과감히 숙청해 모든 권력과 특권을 혼자 휘어잡고, 위협이 될 만한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해 권력에 가까운 이들이 모두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김정은을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려다 추락한 이카로스에 비유하며 “북한의 마천루와 미사일이 의기양양하게 하늘을 찌를수록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위협을 무릅쓰며 자신의 존재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2018년 남북 정상회담 후 한국 사회에서 김정은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데 대한 우려도 나타낸다. 부드러운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의 전략적인 목표와 본질을 놓치고 그의 전술에 잘못된 반응을 보인다면 김정은이 한반도에서 사건을 일으킬 여지를 계속해서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김정은을 '주적'에서 '한반도 평화 통일의 동반자'로 바꾸려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이 반영된 한편 모호한 비핵화 선언과 외교 선회를 통해 살인적 독재자라는 악명을 떨쳐버리려는 김정은의 노력이 효과를 본 결과”라고 평한다. 저자는 한국 정부의 대북전단 금지법에 대해서도 북한 인권단체를 위축시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책은 ‘화염과 분노’의 영향으로 김정은이 미국의 군사 행동 위협을 믿지 않게 되면서 향후 대참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지적한다. 전쟁은 미국 행정부의 선택 사항이 아니지만 ‘젊고 공격적이며 위험천만한 독재자와의 타협’도 선택지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고 책이 뾰족한 수를 담은 건 아니다. 책은 한미일 3국의 협력 강화, 최고 수준의 대북 압박과 제재 유지 및 중국을 향한 압박 강화, 북한에 대한 인권 관련 공세 확대, 북한 내부로의 정보전파 프로그램 투자, 한·미·일·중·러 5자회담 활성화 등을 주문한다. 외교에 묘책은 없으며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교착상태를 이어가는 한반도 정세를 감안할 때 새로운 상상력이 아쉬운 대목이다. 2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