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1월5일부터 8일까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세계 최대 규모 전자·정보기술(IT) 전시회인 ‘CES 2022’가 개최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던 CES 2021과 달리, CES 2022는 2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관심이 뜨겁다. 코로나19로 마치 전 세계가 멈춰 선 것만 같았던 때에도 글로벌 기업들은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치열한 기술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놓고 전 세계인 앞에서 겨루는 자리가 될 것이다.
CES는 1967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줄곧 당대 최신의 혁신 기술을 선보이는 장이었다. CES가 시작된 이후 한동안 이 기술 축제의 주인공은 1970년 VCR을 공개한 네덜란드의 필립스, 1976년 디지털 손목시계를 공개한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 1981년 CD 플레이어를 공개한 일본의 소니 등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 기업들이었다.
미국에서 CES가 처음 개최되었던 1967년, 우리나라에서는 ‘구로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우리에겐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곳으로, 지금의 서울디지털산업단지다. 국내 최초의 공업 단지로 조성된 구로수출산업단지는 국가 주도의 개발 경제 시대에, ‘수출입국’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실현하는 요람이었다. 가발, 봉제, 섬유 제품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수출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잘살아 보려고 했던 우리 조부모, 부모들의 발버둥이 시작된 해가 바로 1967년이었다.
그 시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CES는 들어 본 적도 없는, 혹여나 들어 본 적은 있더라도 그저 ‘머나먼 부자 나라들끼리 신기한 물건들을 한데 모아놓고 자랑하는 남의 잔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기술만으로는 부족하여 포드와의 합작으로 현대자동차가 설립되고(1967년), LG 전자의 모태인 금성사가 대한민국 최초로 AM/FM 라디오 생산을 이제 막 시작하며(1967년), 삼성전자는 아직 창립(1969년)되기도 전인 한국에서 우리가 개발한 제품이 언젠가는 당당하게 CES 무대에 서서,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낼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CES가 시작된 지 약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은 어떠한가. CES는 이제 남의 나라 잔치만은 아니다. 우리의 기업들은 이제 CES의 주인공이라 해도 될 만큼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전 세계 ICT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가전, 전자산업 뿐 아니라 자동차, 조선, 헬스케어, 심지어는 유통 등 서비스까지 거의 모든 산업에서 정보통신기술과의 접목이 중요해지면서, 우리의 기술과 기업이 빠진 CES는 이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주인공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이 정도로 만족해도 될 것인가.
CES 2022 개막을 앞두고 공개된 기업들과 전시에 관한 정보들은 마치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차원의 경쟁을 예고하는 듯하다.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인 우리 대한민국이,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만 같다.
“일상을 넘어서(Beyond the Everyday)”라는 슬로건에 걸맞는 혁신 기술들이 이번 CES에 등장할 것이다. CES 2022에서는 디지털 건강, 푸드테크(식품기술), 우주 등이 주목받는 키워드로 꼽히는 등 이미 일상 가전의 영역을 넘어섰다. 200여 개의 자동차 회사들이 자율주행과 친환경 기술을 앞세워 전시한다. 유통 기업인 아마존이 CES에 등장한다는 소식이 화제가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 CES 2022에서는 CES 역사상 최초로 헬스케어 기업인 애보트의 CEO가 기조연설을 맡았다. 우리에겐 코로나19 백신으로 익숙한 모더나도 CES에 나선다.
이쯤 되면, 어디까지가 ICT 산업이고 또 ICT 산업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누가 경쟁자이며, 누가 파트너인지도 구별하기 어렵다. 우리가 마주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러한 업의 경계를 초월한 경쟁과 협력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반도체 공급이 부족하니, 전 세계의 자동차 공장이 멈춰서는 시대가 아닌가.
“코로나 19는 비대면 경제와 무인화 트렌드를 확산시키는 등 4차 산업혁명으로 야기될 변화를 가속시켜 미래를 앞당기고 있다.” 각 나라들과 기업들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치열하게 미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분투이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압박은 괜한 몽니가 아니다. 고도로 계산된 미래 준비의 일환이다. 시간이 없다. 우리도 여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가는 또다시 기술 경쟁의 변방으로 밀려나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날이 올 수 있다. 절박한 심정으로 준비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을 거쳐,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지금의 선진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가. 먼 미래를 내다보며 적극적으로 연구·개발해 노동집약적 산업과 경제를 반도체, IT 기기와 같은 고부가가치의 기술 우위 경제로 전환한 것이 주효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래를 열기 위해서 기술, 기술 오로지 기술이라는 절실함으로 정부와 기업, 노동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어려움을 감내해 냈다.
4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둔 지금 우리는, 여전히 기술로부터 우리 미래에 대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특히 국가간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차세대반도체, 미래차, 바이오헬스 분야 과학 기술을 집중 육성·강화해 포스트코로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할 것을 제안한다.
모든 기계장치가 전자장비로 변신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류가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서 반도체가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메모리 반도체 세계 정상이지만, 잠시 한눈을 팔면 순식간에 1위를 빼앗기는 산업이 반도체이다. 각국이 자국 내 반도체 기술 및 공급망 강화를 적극 추진하면서 이러한 위협은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의 메모리 반도체 1위에서 시스템 반도체 1위 지위까지 확보해 명실상부한 반도체 최강국이 되려면 정부 차원의 다방면 지원이 절실하다.
다음은 바퀴달린 스마트폰, 미래차 분야이다. 자동차 산업의 판도가 엔진과 기계 기반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기반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지금, ICT 강국인 우리나라에 주도권을 잡을 기회가 왔다고 확신한다. 자동차산업 전환기에 한국기업이 글로벌 분업구조에 참여하고 주도할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마지막, 바이오헬스는 경제이자 안보이다. 세계는 지금 고령화 심화, 난치질환 증가, 코로나 19와 같은 감염병 창궐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바이오헬스는 이러한 인류 난제를 해결할 열쇠이자 국부를 창출할 보물단지가 될 것이다. 바이오헬스 분야의 기초과학기술 역량을 제고하고, 개발부터 상용화에 이르는 전주기적인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바이오헬스 기업이 탄생하지 못할 것이 없다.
대한민국이 살길은 오로지 과학기술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거 성공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아직 과학기술을 국가 운영의 중심축에 둔 적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적 의사결정에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위대한 도약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차기 정부는 ‘과학기술패권국가’를 비전으로 삼아 모든 국력을 과학기술에 집중해야 한다. 다음 5년은 미래 50년, 100년을 결정하는 시간이다. 차기 정부 임기인 2027년까지 차세대 반도체, 미래차, 바이오 헬스의 빅3 핵심산업을 1위 궤도에 안착시는 것을 국정운영의 최우선 과제로 두고, ‘과학기술 입국’을 불가역적이고 핵심적인 정부 철학으로 삼아야 한다.
과학기술인이 정치의 전면에 나설 기회가 확대된다면 우리의 정치 리더십을 더욱 빠르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정책을 바꾸려면 정부와 지자체에 과학기술인이 많아져야 하고, 법을 바꾸고자 하면 국회에 더 많은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 패권 전쟁에서 패배하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산업·경제의 신(新)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과학기술 패권 전쟁은 기업 대 기업의 경쟁이 아니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다. 기업에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기업 홀로 이 거대한 전쟁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기업과 정치 리더십은 가능한 밀접한 사이여야 한다. 과학기술 패권경쟁의 시대에 파고를 넘으려면 정부와 민간이 함께 고민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과학기술에 대한 통찰을 가진 정치인이 입법과 행정의 전면에 나서서 정치 논리가 아닌, 오로지 과학기술 패권 전쟁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할 것인지를 두고 기업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인 초석인 대학이 위기를 맞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 우수 인재가 모이지 않는다는 말이 들린지 오래다. 고등학생이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선택하는 전공만 보아도, 과학기술 전공 학과는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교육을 일컬어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백년을 내다보고 인재를 키우라는 격언이지만, 교육이야말로 하루아침에 성과를 낼 수 없는 과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학위기는 대학 자체의 노력만으로 풀 수 없다. 국가 과학기술 발전전략과 연계해 과학기술 관련학과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4차 산업에 대비해 반도체, 미래차, 바이오헬스 관련 학과를 증설하고 정원을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해당 분야의 수요가 폭증하고 있고 부족 사태의 장기화가 예상되는 만큼 관련 인재 육성을 위해 학과 증설과 정원 확대가 시급하다.
또한 해당 학과들의 산학연계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학교에서 우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산업 현장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산학연계 활동은 곧 졸업생들의 취업과도 이어지기 때문에, 우수 인재들이 과학기술 전공을 선택하도록 하는 데에도 유인이 될 것이다.
이공계 인재의 처우 개선도 수반되어야 한다.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육성한 인재가 마음놓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처우를 개선하는 일도 중요하다. 특허나 실적 등 자신이 이룬 업적은 특허료와 인센티브 등을 합당한 대우로 돌려줘 인재들의 연구 의지를 북돋아 줘야 한다. 이는 민간에 맡겨두기 보다는, 정부가 주도해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할 일이다.
CES가 시작된 지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일본과 미국 등에서 기술을 전수받아 제품을 생산하던 기술 변방국에서 ICT 기술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1967년 조성된 구로공단은 ‘디지털’산업단지로 변모했으며, 그 해 전남 화순산골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나는 여상과 말단 연구원 보조를 거쳐 평생을 반도체 엔지니어로 살았다. 나와 우리 기업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학기술만이 우리의 미래를 열 수 있음을 생생하게 증거한다.
다음 반세기 이후의 CES에 세계를 놀라게 하기 위해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바로 지금, 또 다른 반세기를 위한 과학기술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