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대부분 눈앞에 닥친 일을 하나씩 해결하느라 바쁘게 살아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야가 자연히 넓지 못하고 좁은 근시안으로 헉헉거리며 살아가게 된다. 바야흐로 연말연시다. 이때가 되면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새해를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히 근시안을 벗어나서 멀리 굽어보고 내다보는 원시안의 시야를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묵묵히 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조차도 모르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연말연시를 계기로 한 흐름으로 흘러가던 시간의 흐름을 끊고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봐야 한다.
연말연시가 되면 집에 머물러 있기보다 어디로인가 가고자 한다. 늘 보는 익숙한 공간이 주는 친숙함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자극을 찾기 때문이다. 예컨대 해돋이 명소를 찾아 떠오른 해를 보거나 명산에 올라 탁 트인 장관을 보거나 바다를 찾아 철썩이는 파도를 바라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동을 시도한다. 바라던 곳에 도착하면 그간의 체증과 피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고생을 해서라도 연말연시가 되면 시간과 공간의 단절이라는 의식을 치른다.
물론 이러한 의식을 반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새해라고 해봤자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가 없고 바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되풀이되는 일상이므로 새해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경계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명소나 산이나 바다를 찾으면 길은 막히고 사람이 넘쳐나서 피곤할 뿐이라고 항변한다. 이런 입장에 서면 시간과 공간은 단절이 아니라 의미 없는 무한 연속일 뿐이다. 여기서 나아가 단절을 내세우며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무용론을 설파한다.
앤디 앤드루스가 쓴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는 40대 후반의 가장 데이비드 폰더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폰더 씨는 20년 넘게 묵묵히 일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인수합병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실직하고 7개월이 지나자 집도 저당 잡혔고 어렵게 들어간 임시 일용직에서도 쫓겨난다. 이렇게 궁지에 내몰리게 되자 폰더 씨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원망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고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폰더 씨는 솔로몬 왕, 안네 프랑크, 에이브러햄 링컨 등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폰더 씨는 더 이상 위기에 좌절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지 않는 단단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소설”이라고 하며 가볍게 취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가 사람이 살면서 큰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로 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사람은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의 깨달음을 하나씩 얻게 되는데 이러한 체험이 조금씩 쌓이면서 더 단단해지고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주희는 이러한 체험을 부분들이 전체로 연결돼 하나로 꿰어지는 ‘활연관통(豁然貫通)’으로 표현했다. 사람이 이미 아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영역을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목욕탕에서 뛰쳐나와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의 발견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연관통의 체험이 찾아오면 나를 둘러싼 주위의 겉과 안 및 정밀하거나 거친 경우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마음의 중심과 작용도 환히 빛나지 않는 경우가 없게 된다(이일단활연관통언·而一旦豁然貫通焉, 즉중물지표리정조무부도·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이오심지전체대용무불명의·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
연말연시에 바쁜 일상의 흐름을 잠깐 멈추고 넓은 안목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그러면 그간 뭐가 뭔지 몰랐던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발견이 바로 활연관통이다. 이러한 활연관통이 쌓이면 삶을 전체로 묶어내는 도약의 활연관통을 할 수 있다. 이번 새해에는 해돋이 명소 등의 출입을 통제하므로 사람이 많이 없는 곳을 찾거나 온라인을 통해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퍼즐을 푸는 활연관통의 체험을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