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리더십 없는 정치권…"과학기술이 국가 핵심 어젠다 돼야"

[2022 성장엔진을 다시 켜라 - 과학기술 대혁신]
<1>미래생존 키는 과학기술
AI·반도체·전기차·우주항공 등
美中日 기술패권에 사활 거는데
대선 주자들 科技정책 경쟁 전무
"한국판 OSTP·R&D 혁신 절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 국제 질서)’와 ‘팍스 시니카(중국 주도 국제 질서)’ 체제 간 신(新)냉전. 최근 3~4년간의 국제 질서를 관통하는 화두다.


미국은 최근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의학연구원과 산하 11개 연구소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다. 세계 최대 상업용 드론 제조사인 DJI와 안면 인식 인공지능(AI)사인 쾅스커지 등 8곳에는 미국인의 투자를 금지했다. 이런 투자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기업은 총 60개다.


이는 중국 정부가 신장위구르족의 인권을 탄압해 징계한다는 명분에 따른 것이지만 실상 미중 패권 전쟁의 본질이 과학기술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지난 1991년 말 소련의 해체로 막을 내리기까지 45년 넘게 지속된 미소 냉전기(철의 장막)에 이어 미중 간 신냉전기(기술 장막)가 도래했다. 미·중은 세계 최대 교역을 하면서도 대결이 심화하는 복잡한 형태”라고 분석했다.



◇미중 패권 전쟁의 핵심은 과학기술



미국은 타국이 자국 국내총생산(GDP)의 60~70%가량에 달하면 그들의 예봉을 꺾고 주저앉히고는 했다. 1991년 말 해체된 소련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은 그 10여 년 전부터 밀 수출 동결을 통한 식량난 초래,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시 반군 지원, 막대한 군비 경쟁 유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력을 소진하게 만들었다. 동맹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은 1985년 제조업 패권을 거머쥔 일본과 독일에 대해 과도한 환율 절상 압력(플라자합의)을 가해 기세를 확 꺾었다. 이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단초로 이어진다.


중국은 2010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뒤 팍스 시니카의 꿈(중국몽)을 공공연히 피력해왔다. 실제 인공지능(AI)·빅데이터·우주개발 등 중국의 과학기술 파워는 급부상했다. 미국의 견제로 반도체 자립에 애를 먹고 있지만 전기차·배터리 등 신산업도 주도하려는 모양새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벨퍼센터는 최근 “중국이 10년 내 AI, 5G, 양자정보과학, 반도체, 바이오, 그린 에너지 등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이 2019년부터 글로벌 통신 장비사인 화웨이를 시작으로 중국 첨단 기술 업체에 전방위적 공세를 퍼부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기술 정책 전문가인 안준모 고려대 교수는 “미중이 기술 패권 시대 과학기술·경제·안보를 연계하고 공급망 재편에 나서며 세계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며 “폐쇄적 혁신에서 벗어나 개방형 혁신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한국, G5 도약 위한 비전·리더십 안 보여



우리나라는 세계 최악의 인구절벽 등에 따른 잠재성장률 추락세에다 4대 공적연금에 대한 재정 부담 급증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김무환 POSTEC 총장은 “기술 패권 시대에 경제와 국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전략기술과 차세대 먹거리, 핵심 인재를 확실히 키우고 있는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도체·자동차·전자·배터리·조선·철강·석유화학 등에서 강점을 갖고 있고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부상하고 있으나 AI·빅데이터·우주·양자기술·에너지 등 첨단 기술 쪽에서는 추격자에 그치고 있다. 특히 이건희 삼성 회장이 30여 년 전 설파한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이 오늘날에도 유효할 정도로 정치권과 정부의 리더십이 부족하다. 실제 오는 3월 9일 대선을 앞두고 여야 주요 후보들은 과학기술 중심 국정 운영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박상욱 과학기술과미래연구센터장(서울대 교수)은 “미래, 과학기술, 성장 동력에 대한 비전과 전략에 관한 정책 경쟁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과학기술을 핵심 어젠다로 삼겠다는 지도자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대학·기업의 연구 경쟁력도 나름 향상되면서 해외 과학기술계에서 한국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라며 “기술패권주의 심화와 성장 잠재력 추락 등을 감안해 현재 G10에서 G5로 퀀텀점프하기 위한 비전과 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등 감염병 위기 극복,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 중립 과제를 위해서도 과학기술 철학과 비전이 필요하다는 게 과학기술계의 주문이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주요 후보들이 과학기술 진흥을 통한 G5 진입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며 “차기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중심 국정 운영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대폭 높여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지난해 5월 백악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명예 훈장 수여식에서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초격차 위한 컨트롤타워·R&D 대혁신·기업가 정신



미국은 혁신경쟁법(Endless Frontier Act)을 통해 5년간 AI, 고성능 컴퓨팅, 양자정보 등 10대 기술에 120조 원을 투자한다. 중국은 ‘국가 총동원 체제’를 선언하며 AI·양자정보·반도체 등 7대 과학기술 확보와 신소재 등 8대 산업 육성에 나선다. 일본도 AI·양자기술·바이오 등 10대 기술 개발에 총력전을 편다. 최근 우리 정부가 10년 내 일본과 유럽연합(EU)을 뛰어넘는 수준의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AI, 5G와 6G, 첨단 바이오, 반도체, 첨단 로봇, 양자기술, 우주·항공 등 10개 분야 기술을 ‘국가필수전략기술’로 지정해 총력전을 펴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창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초원천연구정책관은 “기술 패권 시대에 미국과는 경제 안보, 과학 동맹, 중국과는 민간 기업 중심으로 교류를 확대하며 비교 우위 분야는 초격차 전략, 비교 열위 분야는 격차 축소 전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과학기술부총리나 혁신부총리제 도입, 백악관 과학기술정책국(OSTP)을 참고한 한국판 OSTP 신설, 연구자 중심 R&D 체계 강화, 과학기술자문회의 기능 강화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쏟아지고 있다. 윤지웅 미래혁신정책연구원장(경희대 교수)은 “국가 R&D에서 대혁신을 꾀해 산학연 융·복합을 강화하고 G5 프로젝트 같은 전략 기술 확보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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