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이 비워내는 해였다면 2022년에는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채워가야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지휘자 성시연(사진)은 그래서 본질이 더 눈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 온 그이지만, 코로나 19로 인한 공연 취소와 앞날에 대한 불안은 직업과 사람, 유명세를 가리지 않았다.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부터 이 위기에 강하게 맞설 의지가 있는 지를 내내 생각했어요. 이 시간을 거치며 불순물을 제거하고 나니 음악 자체, 그 본질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저 느끼고, 또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음악은 분명 힘을 발휘했고, 이 순수한 힘을 만끽하는 동시에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음악가로서의 일이었다. 불안과 의심, 잡념이라는 불순물을 비워내니 비로소 그 안에 희망과 용기를 채워 넣어야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이 마음을 담아 성시연은 ‘힘찬 응원의 선율’을 지휘한다. 오는 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신년 음악회(#힘내요 서울시민)’를 통해서다. 독일에서 입국해 공연을 준비 중인 그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성시연은 지난해 1월 서울시향의 첫 정기 공연에서 하이든 교향곡 44번 ‘슬픔’과 루토스와프스키의 ‘장송 음악’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당시 “거울을 보듯 현시점을 들여다보고 비석을 세우는 마음을 담았다”던 그는 올해 신년 무대에서는 새해의 온기와 에너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곡이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이다. 성시연은 “차이콥스키 작품은 인간의 삶의 비애나 희망, 열정을 모두 담고 있다”며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마음에 온기를 품을 수 있는 곡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의 교향곡 중 하나를 선택했다”고 선곡 이유를 밝혔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은 다변적이고 격정적인 선율이 매력인 곡으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토대로 작곡됐다고 알려져 있다. 차이콥스키는 1878년 이 작품 초연 후 자신의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 곡은 내가 작곡한 작품 중 최고다. 한 마디 한마디 내가 진실로 느낀 것을 표현했고 깊게 숨겨진 마음을 반영하지 않는 것이 없다’며 애정과 만족감을 드러냈다. 성시연과 서울시향은 이 외에도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지는 글린카의 ‘루슬란 류드밀라’ 서곡,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협연하는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함께 선보인다.
위기 속에서도 희망과 기회의 싹은 움트는 법이다. 코로나 19로 음악가로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성시연은 지난해 11월 극적으로 세계 최정상급 악단 중 하나인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에 데뷔했다. 정명훈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 RCO 지휘였다. 중국 현대음악 작곡가 탄둔이 팬데믹으로 인한 여행 제한으로 포디움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RCO는 긴급히 성시연을 초청했고, ‘준비된 자’는 이 공연을 최고의 기량으로 이끌며 ‘세계 여성 지휘자 열풍’의 중심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그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이 환하게 비추는 무대를 향해 높이 뛰어오르는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며 “꿈에 그려 온,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달려온 무대가 내게 열렸을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2022년에도 의미 있는 도전은 계속된다. 대표적으로 오는 7월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BRSO) 데뷔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BRSO는 1949년 창단된 독일의 명문 악단이다. 성시연은 이 데뷔 무대에서 현대음악인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과 윤이상의 ‘예악’ 등을 지휘한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편성이 돼 행복하다”며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무대를 선보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성시연은 지난해 9월 오랜만에 열린 베를린 필의 대면 공연을 보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1년 반 만에 온라인 아닌 공연장을 찾아 감상한 콘서트였다. “연주도 훌륭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는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그 자체로 감동이었죠. 음악 하는 사람들은 관객에게 늘 이 감동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마음으로 준비하는 신년 무대다. 그는 “부제처럼 우리의 음악을 듣고 많은 분이 힘과 위로를 얻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