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음모론 난무하는 세상, 우리는 왜 진실을 공유하지 못할까

■지식의 헌법
조너선 라우시 지음, 에코리브르 펴냄


지난해 12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글 한 편을 올렸다. 자신을 둘러싼 음모론에 관한 해명이었다. 게이츠는 지난 2015년 한 강연장에서 ‘앞으로 몇십 년 안에 1,000만 명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할 바이러스가 나타날 것’이라며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인구수를 큰 폭으로 줄여야 한다’고 했는데, 일부 네티즌은 이 발언을 근거로 팬데믹 배후에 빌 게이츠가 있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문제는 이 황당한 소문(?)이 실제 미국의 백신 접종률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빌 게이츠는 ‘코로나 19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음모론이 미국의 백신 접종량을 낮추고 있다’며 ‘해당 음모론이 아니었다면 백신 접종량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디지털 미디어를 타고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바이러스처럼 확산하는 시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또 무엇이든 믿을 수 있는 세상에서 진짜와 가짜,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는 우리의 능력은 나날이 약해져만 간다. 신간 ‘지식의 헌법’은 현 인류가 당면한 인식론적 위기를 진단하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책은 인지적 오류를 인간 본성의 일부로 인정한다. 인간은 집단 내에서 안전한 지위를 얻는 한편 ‘우리’를 지키기 위해 논증하며 진화해 왔다. 문제는 진화라는 것이 반드시 진실로 귀결되는 방식의 사고 능력이 아닌 설득하는 방식의 사고 능력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진실을 찾도록 노력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토론 상황에서 논쟁과 설득, 그리고 조작에 관여하기 위해 진화해 왔다. 집단 간 신념·견해차는 배척과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인류는 자멸하지 않았다. 책은 그 이유로 ‘지식의 헌법’을 든다. 지식의 헌법은 지식을 만드는 방식에 옳고 그른 게 있다는 공동의 가치·규칙·제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책은 17~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현대의 인식론적 질서가 어떻게 구축되고, 지금의 지식의 헌법이 잉태됐는지를 설명한다. 전반부에서 역사와 이론적 배경을 짚어본다면 후반부는 지식의 헌법이 위협받는 오늘날 미국 사회를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저자는 디지털 생태계를 태동시킨 미국의 상업적 인터넷이 애초 인식론적 결함에서 출발했음을 꼬집는다. 광고를 비즈니스 모델로 삼은 탓에 주목성이 최우선이 됐고, 대화와 가치, 지식보다는 분노와 허위 정보에 안성맞춤인 시스템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반에서 확산한 트롤링(악의적이거나 주제와 무관한 온라인 게시글을 고의로 올려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과 취소 문화(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신공격이나 불매 운동 등 상대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행위)가 허위 정보와 대체 현실, 강압적 동조와 이념적 블랙리스트를 확산시키는 구조, 미국 정치권이 이 둘을 어떤 식으로 악용하는지를 상세히 분석한다.


지식의 헌법은 힘겹게 얻어낸 규범이자, 전투의 결과다. 이는 결코 저절로 유지되지 않았고, 이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의 노력 덕에 현재에 이르렀다. 또 다시 도전과 위협을 맞닥뜨린 지금, 저자는 위기와 함께 희망을 말한다. 소셜 미디어의 집단 테러로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 취소 문화의 타깃이 된 사람을 지원하는 기업, 열린 논쟁 운동을 벌이는 대학 등 집단은 집단으로, 무가치와 무구조는 철저한 정책 설계로 맞서는 사례들이 소개된다. ‘지식의 헌법’의 수호자들을 소개하며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 지식의 헌법을 지지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그리할 때, 자부심을 느끼는 건 적들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2만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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