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정책 패러다임이 시장 개방 중심에서 기술·디지털·백신·기후변화에 초점을 맞춰 급변하고 있습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서울 중구에 자리한 집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무엇보다 통상의 신규 트렌드는 기술 통상”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됐으며 각국의 산업 정책이 부활했다”며 “이후 핵심 기술을 자국 공급망 내에 두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한국은 미래 산업의 패권을 좌우할 반도체·배터리·전기차 등을 보유하고 있어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이어 “인공지능(AI)이나 6세대(6G) 이동통신 기술에서 어느 진영이 기술표준을 주도하느냐에 따라 기술 및 산업 패권이 바뀔 것”이라며 1970년대 비디오 시장에서 기술 우위에 있었던 ‘베타맥스’ 기술이 표준 경쟁에서 뒤처져 VHS 기술에 시장을 내준 사례를 거론하기도 했다.
여 본부장은 최근의 지역별 다자 통상 움직임과 관련해서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같은 다자 통상 기반 위에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양자 통상을 적극 활용해 ‘국부 창출형’ 통상에 나설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한국을 둘러싼 글로벌 통상 질서는 다음 달 국내에 발효되는 RCEP를 비롯해 2020년 일본 주도로 창설된 CPTPP 등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여 본부장은 올 3월께 CPTPP 가입 신청서를 제출할 방침이다. 앞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CPTPP 가입 의사를 밝혔지만 통상조약법에 따라 관련 의견을 묻는 공청회 및 국회 보고 등을 거쳐야 해 일러도 3월에야 가입 신청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 본부장은 “CPTPP는 우리나라가 9년 동안 준비해온 이슈이며 양자 FTA와는 별도로 RCEP·CPTPP와 같은 경제 블록 위에 올라타려 하는 것”이라며 “우리나라같이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경제 블록 참여가 필수이며 한국이 필요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협상 시 반영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는 특히 향후 공급망 이슈가 2019년 일본이 초정밀 반도체나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제조용 소재의 수출을 제한했던 것과 같은 ‘하이테크’ 영역과 지난해 말 한국을 들썩이게 했던 요소수 같은 ‘원부자재’ 등 투트랙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 본부장은 “최근 글로벌 공급망은 첨단 기술을 가진 업체들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데다 자원이나 핵심 광물 관련 공급망 형성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며 “경제 블록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이 같은 글로벌 공급망 변화 기조 속에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여 본부장은 FTA나 또 다른 형태의 FTA인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등에도 주력할 방침이다. 실제 우리나라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FTA가 체결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 인도네시아와 별도의 FTA를 체결하며 경제적 협업 관계를 한층 강화했다. 무역협회 분석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상품 시장 개방 수준은 기존 아세안 FTA 체제하에서는 80.2%(품목 수 기준)였으나 CEPA 체결로 92.1%까지 높아졌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인도네시아 자동차·철강 시장에서 보다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다음 달 발효되는 RCEP 또한 시장 개방 수준이 85%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꾸준히 양자 FTA 체결이 필요한 상황이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이 CPTPP에서 탈퇴한 데다 조 바이든 행정부 또한 CPTPP 가입을 고려하지 않고 있어 CPTPP가 ‘반쪽짜리’ 경제 블록 아니냐는 우려도 내놓는다. 이에 대해 여 본부장은 “미국이 없다고 해서 CPTPP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 경제구조를 놓고 봤을 때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고 본다”며 “자동차·조선·TV·반도체와 같은 주력 수출품 외에 바이오헬스, 진단 키트, 2차전지, 화장품, K콘텐츠, 농산품 등 신규 성장 동력들의 시장 개척을 위해서라도 CPTPP 가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미국이 현재 설립을 추진 중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안이 나와야 판단할 수 있지만, 기존 경제 협약 대비 낮은 강제성을 가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일자리와 인권 또한 중요한 통상 요소가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 본부장은 “미국만 하더라도 일자리를 중심으로 한 노동 환경 등을 특히 강조하고 있고 유럽연합(EU) 또한 마찬가지”라며 이어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제작된 상품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법안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제정되려 하고 있으며, 이 같은 차원에서 무역이나 통상 정책에서도 관련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한국산 철강 수입 물량을 제한한 것(쿼터제)과 관련해서는 경제 논리로 미국 측을 설득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앞서 미국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EU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 10%씩 부과해온 관세를 철폐하고 무관세 물량을 부여하기로 한 바 있다. EU 외에도 일본·영국 등이 잇따라 무관세 혜택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는 반면 한국 철강은 관세가 없는 대신 직전 3년 평균 물량의 70%만 수출할 수 있어 업계의 우려가 상당하다. 여 본부장은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 외에도 상무부·의회를 통해 철강 쿼터 확대를 요청하고 있다”며 “무엇보다 값싸고 품질 좋은 한국 철강 수입 물량을 늘려야 미국의 원부자재 가격 상승 추이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하방 산업 경쟁력 또한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탄소국경세와 관련해서는 “우리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적극 대응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이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며 “아세안 국가와의 FTA 협상 당시 우리 정부의 탄소 중립 기술을 현지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안 등을 조항에 담도록 해 탄소 중립 이슈가 우리의 기회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