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하라 넨 "日정치인이 감추려는 진실 연극으로 되돌리고파"

연극 '하얀 꽃을 숨기다' 11일 韓서 낭독 공연
NHK 위안부 방송 정치 외압 변경 사건 소재로
"집필중 자료·위안부 증언 보며 강렬한 인상…
변경 인정 안한 법원 판결에 분노·죄송한 마음"

연극 ‘하얀 꽃을 숨기다’의 작가 이시하라 넨/히데미 시노다

지난 2001년 1월 30일, 일본 NHK 교육 채널에서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시리즈의 2부 ‘전시 성폭력을 말한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일본군 성노예 제도를 심판하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다룬 내용이었다. 그런데 방영 직후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일부 관계자와 시민단체는 당혹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당초 제작 방향과 달리 위안부와 전 일본 병사의 증언 같은 주요 장면이 삭제됐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개입을 주장하며 시민단체가 제기한 소송은 7년 공방 끝에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이 ‘NHK 방송 변경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 ‘하얀 꽃을 숨기다’가 오는 11일 한국 관객과 만난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한일연극교류협의회가 11~13일 국립극단에서 선보이는 ‘제10회 현대 일본 희곡 낭독 공연’을 통해서다. 외면당한 진실을 알리려는 자와 은폐하려는 자,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역사 문제와 오늘의 인간 군상을 담아낸 작품의 작가 이시하라 넨(石原燃·사진)을 이메일 인터뷰로 만났다. 일본에서 2017년 초연한 이 작품은 2018년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연출상을 받았다.


“일본 정치가들이 필사적으로 ‘없던 일’로 하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일본 식민시대의 대만 이야기(프로모사!)나 2011년 원전 사고 직후 도쿄의 모습(팔삭) 등 역사·사회 이슈를 다룬 작품들을 선보여 온 작가는 일본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킬 법한 이 작품의 집필 의도를 이 같이 밝혔다. “과거의 비극으로만 비치는 위안부 문제가 동시대의 문제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해 오던 그에게 NHK 사건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진실을 없애려 한다는 것, 글을 쓰는 자신도 언제든 압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하얀 꽃을…’은 한 다큐멘터리 제작사가 방송국 프로그램 기획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스태프들은 역사의 진실을 전달하고자 노력하지만, 방송국에서 이례적인 지시가 잇달아 내려오고, 프로그램 내용의 변경을 강요받는다.



연극 ‘하얀 꽃을 숨기다’의 일본 공연 장면/P컴퍼니

작품 집필을 위해 사건에 관한 서적과 문헌을 파고든 작가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 영상을 꼼꼼히 챙겨보고 “일왕에 대한 유죄가 선고될 때 여성들이 환호하는 장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메이지 시대에 전쟁 목적의 국가 체제를 만들며 생겨났습니다. 일왕 중심 국가 체제의 억압이 더 약한 자에게 연쇄되어 간 것이죠.” 구속력 없는 민중 법정이었지만, 약자인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 천황에 대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장면에서 강렬한 무엇이 느껴진 이유다.


힘으로 표현의 자유를 짓밟으려는 움직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 19로 위축된 일본 연극계에서는 생존을 위해 정치 비판 색을 빼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얼마 전에는 역사 수정주의로 유명한 대기업이 연극제 협찬사로 참여하면서, 이 기업의 비위를 맞추려 실행위원회가 ‘반(反) 반(反) 권력’을 강조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시하라 작가는 “일본의 문화 행정은 예산 규모도 작고, 예술가들은 적자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며 “사회 전체의 빈곤화가 진행되면 특정 작품에 압력을 가할 필요도 없이 소극장 연극 전체를 돈으로 장악하는 게 매우 쉬워진다”고 안타까워했다.


‘방송 변경’ 사건은 일본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아 ‘변경이 아닌 일’이 됐다. 작가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분하고 또 죄송하다”며 “연극을 통해 감추어진 것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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