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긴축 바람이 거세지만 미래 먹거리를 위한 각국의 투자는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는 새해에도 국가·기업별로 천문학적 투자와 지원 방안이 발표되는 등 ‘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반도체 강국을 지키려면 새로운 캐시카우(현금 창출원)를 서둘러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올해 1월 반도체공학회장에 취임한 이윤식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초빙교수는 7일 “메모리 반도체의 성장 한계에 대비해 ‘플랜B’ 구축이 시급하다”며 “차기 정부는 출범 초부터 비메모리 반도체 전력 강화 작업에 나서 5년간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교수는 “비메모리 육성을 위해서라도 국내 팹리스(설계 전문) 업체들이 커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며 “메모리가 호황이던 지난 1990년대 중반 반도체 설계자동화(EDA) 산업이 정부의 관심 부족으로 고사했던 상황을 팹리스 산업에서 되풀이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 산업은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며 “우리도 제대로 된 정부 지원이 없으면 과거 일본 반도체 산업이 겪었던 패착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도체발(發) 글로벌 산업 패권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됐는데 어떻게 평가하는가.
△미국과 옛 소련이 인공위성을 처음 띄울 때에 비유할 수 있다. 양국이 각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국의 교육이 많이 바뀌는 등 국가 전체에 변곡점이 마련됐다. 산업 패권 전쟁의 규모와 양태가 다를 뿐이지 양상 자체는 ‘인공위성 전쟁’ 초기와 비슷하다. 소련 해체 때까지 미국이 집중 견제한 것처럼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도 계속될 것이다.
-미국의 공격에도 중국 반도체 산업은 건재하다.
△지난 1년 동안 미국이 산업 동맹 등으로 중국을 포위했지만 실질적 타격을 주지 못했다. 중국의 기술력은 간단하지 않다. 중국 기업에 취업했다가 돌아온 반도체 인재들에 따르면 한국에 앉아 느끼는 것과 사뭇 다르다고 한다. 생각보다 경쟁력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매스컴에서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전하는 측면이 있고 잘못 전달하는 부분도 있다. 반도체는 최첨단 제품이 필요하지만 범용도 있어야 한다. 중국이 이 시장을 가져가고 제품을 개량해가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본다. 중국 반도체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앞서 있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이 따라올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우리가 메모리 사업을 한 지 50년이 안 됐다. 우리가 했는데 다른 나라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장애물은 있다. 메모리가 미세 공정으로 가면서 제조 비용이 커졌다. 투자 규모의 차이가 중요해진 것이다. 최근 중국 일부 기업들의 자금 부족은 제조는 했는데 이익이 남지 않아 발생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들의 뒤를 봐주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격차를 유지하려면 기술·투자 자금 두 가지 차이를 다 유지해야 한다. 한 가지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메모리 시장이 호황이던 1994~1995년에 반도체 EDA 산업이 다 죽었다. 정부가 차라리 간섭하지 않으면 민간이 알아서 잘한다고 해서 가만뒀다. 반도체 설계를 하려면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산업이 고사한 것이다. 반면 호황기에 미국 설계 회사들은 점유율을 높였다. 이들은 한국 등의 인력을 영입해 썼다. 한국은 당시 메모리 반도체를 빨리, 많이 만드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소프트웨어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EDA 인력은 다른 분야로 옮겨갔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미국에 종속됐고 지금은 EDA 소프트웨어 100%를 수입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호황기에 핵심인 EDA 산업을 스스로 놓친 것이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민간에만 맡겨서는 안 되고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반도체를 만드는 인프라·설계·제조 등이 모두 구축돼야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다. EDA 산업을 놓친 것은 우리의 생태계 하나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두 번째로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게 팹리스다. 생태계의 중요한 축인 팹리스가 EDA처럼 또 없어질까 두렵다. 팹리스의 최대 장점은 중소기업이 하기 좋은 분야라는 것이다. 기존 업체들을 키우고 인수합병(M&A)을 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비메모리 발전을 위해서도 팹리스를 키워야 한다. 팹리스 산업을 키우지 않으면 반도체 강국이 지속될 수 없다.
-최근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대만 TSMC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정부 보조금까지 지급했다. 일본 반도체의 부활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1983년 옛 금성사에 재직하며 일본 IBM과 함께 일했다. 일본인은 보수적이지만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일본의 저력이 높다고 보는 이유다. 일본 반도체 산업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패러다임 전환 시기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공정이 첨단화하는 현시점에는 오히려 그들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소니의 이미지센서는 경쟁력이 있다. 일본이 어느 순간 시장의 게임체인저 기술을 내놓을 수 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은 기술 수준을 높이고 투자도 할 수 있으므로 다시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올라갈 수 있다.
-일본의 과거 패러다임 적응 실패를 지적했다. 우리는 그런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없는가.
△일본이 디지털 시대에 갈아타지 못해 도태됐듯이 기존 절대 강자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자동차가 내연기관에서 전기 자동차로 바뀌고 있다면 반도체에서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화두로 떠올랐다. 자율주행 등 디지털 혁명에 쓰이는 칩들을 통해 새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 시기에 정부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 일본 같은 패착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인텔이 최근 파운드리(위탁 생산) 진출을 선언하고 대규모 투자와 공장 건설을 발표했다.
△인텔은 1980년대 초 선제적 결정이라며 수익률이 적다는 이유로 메모리를 포기했다. 최근 다시 파운드리를 하겠다니 격세지감이다. 미국은 마진이 10% 이상 안 나오면 포기한다. 인텔이 마진이 떨어지는 파운드리를 한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시도로 볼 수 있다. 파운드리에 진출해 모자라는 이익은 정부 지원으로 보전받는 형태다. 반도체를 국가 주력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지가 담긴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은 살아날 수 있을까.
△반도체 가치사슬 중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쪽이 설계인데 이 분야의 최대 강국이 미국이다. 설계 분야의 부가가치가 제조 분야보다 3~5배 높다. 미국이 그간 설계만 갖고 생산 시설을 팔았는데 다시 제조 분야에 뛰어들겠다는 것이다. 설계를 잡고 있으니 생산도 빠르게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진율이 20~30%에 이르지 못하면 포기했던 기업들이 5%밖에 안 되는데도 하겠다는 것을 보면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주변국의 움직임을 종합할 때 우리 반도체는 앞으로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메모리 분야에서는 우리의 경쟁력이 아직 높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우리가 메모리 시장에서 70% 정도를 잡고 있지만 비메모리에서는 파운드리를 제외하면 1.6%에 불과하다. 그나마 대부분이 이미지센서다. 아주 열악하다. 대만도 10%에 이른다. 반도체 산업이 연간 3,000억 달러 수준인데 이 가운데 비메모리가 2,000억 달러에 이른다. 비메모리 경쟁력을 키우려면 기술로만 해결할 수 없다. 투자·인력·기술·정책이 융합돼야 가능하다.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 생태계는 인력, 인프라, 투자 환경, 가치사슬 등을 전부 포함한다. 이들을 동시에 지속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반도체는 민간에만 맡기면 안 된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 의지가 결합돼야 강국을 유지할 수 있다.
-비메모리 산업 육성을 위해 중장기 마스터플랜이 필요할 것 같은데.
△차기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5년 동안 집중적으로 비메모리 산업을 육성했으면 한다. 특히 팹리스 기업들이 커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인력도 확보해야 한다. 메모리의 성장이 한계에 이를 때를 대비해 서둘러 플랜B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5~10년 이상 한자리에 있어야 한다. 담당 공무원들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연속성이 없고 전문적이지도 못하다. 정책 담당자들의 학문적 깊이가 없고 사명감이 없으니까 반도체특별법으로 불리는 ‘국가첨단산업특별법’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법이 됐다.
-정책 담당자들의 전문성 이상으로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공학을 공부하는 인원 자체가 모자란다. 우리도 이제 외국의 기술 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유학생도 데려오고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 남아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자체 인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공과대학의 인기도 많이 줄었다. 반도체 인력 문제를 반도체만으로 풀려고 할 게 아니라 교육 분야 등의 규제를 같이 풀어 외국 유학생들이 우리 반도체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과 거주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인재를 키우기 위해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도 풀어야 한다.
He is…
1958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서울 중경고,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전산학 석사 학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금성사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미국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센터 책임연구원, LG반도체 설계기술연구소 연구개발실장 등을 역임했다. 반도체 기업 파이손테크 대표에 이어 호서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소프트웨어진흥원 연구교수, 전자부품연구원(KETI) 시스템반도체본부장 등을 거쳐 2015년부터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올 1월 반도체공학회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