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은 불치병? 70%는 약물치료로 일상생활 가능

■차별과 싸우는 뇌전증
치매·뇌졸중과 '3대 신경계질환'
환자 36만 추산…진료는 15만 뿐
"지적 능력 떨어져 사회활동 제약"
의심 눈초리에 뇌전증 발병 숨겨
약물치료 발작억제·수술도 효과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 시저, 프랑스 혁명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나폴레옹, 소설 ‘죄와 벌’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뇌전증을 앓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인류의 역사에 남긴 업적을 꼽씹어 보면 뇌전증에 걸렸다고 해서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뇌전증은 신경세포의 과도한 전기적 방전에 의해 경련, 의식 소실 등 다양한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만성 질환이다. 치매(70만 명)·뇌졸중(60만 명) 다음으로 환자 수가 많은 3대 신경계 질환으로 꼽힌다. 미국 뇌전증재단은 뇌전증 유병률은 전 세계 인구의 약 0.5~1%라고 추산했다. 인종·연령·국가·지역에 관계없이 흔하게 볼 수 있는 신경계질환이다. 기원전 1500~2000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바빌로니아 왕국과 이집트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발병 역사도 길다.


학계는 국내에만 36만 명이 넘는 뇌전증 환자가 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집계한 뇌전증 진료 인원은 연간 15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 대한뇌전증학회는 절반 이상 차이가 나는 배경에 대해 “사회적 차별 때문에 뇌전증을 앓고 있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환자들이 많다”는 분석을 내놨다. 환자나 보호자가 증상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적지 않은 환자가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뇌전증(epilepsy)은 ‘악령에 영혼이 사로잡힌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어원을 가져왔다. 신경생리학의 발달로 뇌전증 발병 기전이 밝혀지기 전까지 오랜 기간 정신질환으로 여겨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뇌전증을 일컫던 간질, 전간증은 미친병, 지랄병이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대한뇌전증학회는 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 지난 2012년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병명을 변경했다. 세계뇌전증학회와 세계뇌전증협회는 2015년부터 2월 둘째 월요일을 ‘세계뇌전증의 날’로 지정하고, 질환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뇌전증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 뇌전증 환자들이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하려는 취지다.


발작은 중추신경계(CNS)를 침범하는 모든 질환에서 나타날 수 있다. 역학 연구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의 3분의 1 이상이 뇌병변이나 뇌졸중·뇌염·뇌종양 등 뇌손상의 병력을 동반한 것으로 보고됐다. 연령별로 뇌전증 발작이 발생하는 원인도 차이가 있다. △분만 중 뇌손상 △뇌염이나 수막염 후유증 △뇌 형성 과정의 문제 등 선천발달 및 유전질환이 원인인 경우 생후 1년 이내에 주로 발생하지만 뇌졸중 등 퇴행성 뇌질환 관련 뇌전증은 노인 환자에서 주로 생긴다. 실제 뇌전증 환자의 연령별 분포를 살펴보면 10~20대와 70대 이상에서 많은 U자 형태가 그려진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고령사회로 접어든 국가에서는 소아 환자는 줄어들고 노인 환자는 증가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여전히 상당수는 원인을 알지 못한다.


뇌전증 환자라고 하면 흔히 바닥에 쓰러져서 눈동자가 돌아가거나 입에 거품을 물고 팔다리를 떠는 발작 증상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침범된 뇌의 영역에 따라 환자의 증상은 천차만별이다. 의학적으로는 1981년 국제뇌전증연맹(ILAE)이 임상 증상과 뇌파소견을 토대로 정한 기준에 따라 크게 △부분발작 △전신발작 △이외의 발작으로 구분한다. 대뇌피질의 일부 국소 부위에서 기인하면 부분발작, 대뇌의 광범위한 부위에서 동시에 양측이 대칭적으로 시작하는 유형이 전신발작이다. 의식 손상 여부 등 발작 유형에 따라 다시 △단순부분발작 △복합부분발작 △부분발작에서 기인하는 이차성 전신발작 △전신강직간대발작 △결신발작 △간대성근경력발작 △무긴장발작 등으로 나뉜다. 결신발작의 경우 갑자기 하던 행동을 중단하고 멍하니 바라보거나 고개를 떨어뜨리는 증세가 5~10초 정도 지속되는 유형으로, 발작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뇌전증 발작을 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항경련제 복용이다. 전문가들은 뇌전증 환자의 약 60~70%는 약물 복용으로 발작 증상을 억제하면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조언한다. 전염 가능성이 없고 1년에 2~3번, 대개 5분 이내의 발작이 일어날 정도여서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받으면 당뇨병·고혈압보다 관리가 쉽다는 것이다. 일부는 완치도 기대할 수 있다. 단 발작의 종류와 뇌전증 증후군에 따라 사용하는 약물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므로 반드시 신경과 전문의를 통한 상담및 처방이 이뤄져야 한다. 약물치료로 발작이 조절되지 않는 30%의 환자는 ‘난치성 뇌전증’으로 진단하고, 수술적 치료를 고려할 수 있다. 수술 전 두개강 내 전극을 이용한 뇌피질파 검사 등 충분한 검사를 통해 예상되는 수술 결과와 수술 후 발생할 수 있는 신경증상 등 합병증을 면밀하게 검토한 다음 수술 여부와 방법을 결정한다.


최윤호 인천성모병원 뇌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에 대한 수술 기법이 발달하고 치료성적이 향상됐다. 뇌종양이나 동정맥 기형 등 뇌전증의 원인 병소가 뚜렷한 경우 일차적으로 수술을 고려하기도 한다”며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도 미주신경자극술·뇌심부자극술·반응성뇌자극술·케톤생성 식이요법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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