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구입할 때 보통 땅을 함께 사는데 내 땅이라고 꽃 한 송이 마음대로 심을 수 있나요? SH는 건물만 분양하는 반값 아파트를 ‘백년주택(가칭)’이라는 이름으로 공급할 겁니다. 서울 시민들이 평생 집 걱정 없이 살도록 계약 기간도 99년으로 하고 품질 좋은 명품 아파트로 지을 예정입니다.”
김헌동 서울주택도시공사(SH) 사장은 최근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SH 본사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아파트에 속한 땅은 공동 지분으로 쓸 수도 없는 땅인데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있느냐”며 “건물만 사면 된다”고 강조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삼고초려로 SH 사장 공모에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재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1월 취임한 그는 취임 일성으로 ‘반값 아파트’를 들고 나왔다. 예전에도 시도됐지만 대거 미분양이 발생하거나 ‘로또 분양’ 논란이 일며 실패한 정책으로 치부됐다가 집값이 유례없이 폭등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취임 3개월을 맞은 김 사장을 만나 역점 사업인 ‘반값 아파트(토지임대부 주택)’와 ‘분양원가 공개’에 대한 구상을 들어봤다.
반값 아파트는 땅은 공공이 소유하고 건물만 분양해 분양가를 기존의 절반 이하로 낮추는 ‘토지임대부 주택’이다. 이를 통해 강남은 5억 원, 서울 다른 지역은 3억 원에 아파트를 공급하는 게 가능할 것으로 김 사장은 보고 있다. 그는 반값 아파트를 ‘백년주택’이라는 브랜드로 공급할 계획이다. 말 그대로 집 걱정 없이 평생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김 사장의 의지가 담겼다. 김 사장은 “반값 아파트의 주인인 서울 시민들이 평생 살려면 임대 기간이 99년은 돼야 한다. 그래서 ‘백년주택’이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있다”며 “반값 아파트를 계획대로, 이른 시일 내에 공급할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반값 아파트가 들어설 후보지로 강서구 마곡, 강동구 고덕강일, 송파구 위례 등을 꼽으면서 “이들 지역에 이미 공급하기로 된 물량을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며 “내부 검토 및 서울시와의 협의, 법·제도 개선 등의 절차를 거쳐 공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사장이 처음 반값 아파트의 필요성을 제시한 것은 지난 2005년이었다. 건설사에서 20년간 근무한 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시민운동을 하던 시절이다. 그는 “2005년 판교 신도시 개발 때부터 반값 아파트 도입을 주장했다”며 "그때 이후 신도시에서 건물만 분양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주택문제로 이렇게 심각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임기 내에 토지를 빼고 건물만 거래하는 방식으로 아파트 거래 관행을 전환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추진하는 반값 아파트에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꼬리표처럼 뒤따른다. 강남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이 15억 원을 육박하는 상황에서 5억 원짜리 아파트를 공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 사장이 꺼내든 것이 ‘분양원가 공개’다. 그는 취임 한 달만인 지난해 12월 고덕강일4단지의 건설 원가 61개와 택지 조성 원가 10개, 총 71개 항목을 공개했다. 2019년 분양한 이 단지의 3.3㎡(평)당 택지 조성 원가는 445만 원, 건설 원가는 689만 원이었다. 당시 분양가(3.3㎡당 1756만 원)를 고려하면 SH의 수익률은 35%에 이른다. 지난달에는 송파구 오금지구 1·2단지와 구로구 항동지구 2·3단지의 분양 원가도 공개했다. 김 사장은 “건설 원가가 평당 600만~700만 원인 점을 감안하면 25평 아파트를 건물만 분양할 경우 1억 5000만~1억 7500만 원에 공급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반값 아파트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김 사장은 오는 24일에도 SH 본사에서 기자 설명회를 열고 강남 세곡2지구의 분양 원가를 공개하는 등 매달 분양 원가를 공개할 방침이다.
‘반값 아파트니까 품질도 평균 이하일 것’이라는 우려도 ‘서울형 건축비’를 통해 불식시킬 계획이다. 김 사장은 “정부가 정하는 기본형 건축비는 3.3㎡당 687만 9000원인데 이보다 50% 이상 높인 ‘서울형 건축비’를 준비하고 있다”며 “25평 아파트를 짓는 데 지금보다 1억 원 정도 더 들인다고 하면 민간보다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정한 낮은 기준의 건축비를 적용해 건물을 짓다 보니 공공이나 민간 모두 품질이 저하된 측면이 있다”면서 “충분한 비용, 충분한 공사 기간을 들여 200년, 300년 쓸 수 있는 품질 좋은 ‘명품 아파트’를 짓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은 지 30~40년 된 아파트를 경쟁적으로 부수고 재건축하는 국내 상황을 비판하면서 “1931년 준공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90년이 넘었지만 재건축 얘기가 없다”고 말했다. “당시 건축주가 충분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감독하면서 지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사장은 반값 아파트의 신속한 공급을 위한 제도 마련에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SH는 부실 시공을 방지하기 위해 건축 공정률 90% 시점에 분양 공고를 내는 후분양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급한 수요를 위해 본청약보다 2~3년 앞서 예비 입주자를 선정하는 ‘사전예약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다만 김 사장은 사전예약제가 국토교통부의 사전청약제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전청약은 선분양보다도 빠른 ‘선선분양’의 개념인 반면 사전예약은 후분양을 전제로 택지가 확보돼 어느 정도 사업이 진척됐을 때 예약하는 방식”이라면서 “선분양보다 사업이 더 가시화된 상황에서 진행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김 사장은 주거 취약 계층에 대한 서비스도 한층 강화할 방침이다. 은퇴자나 고령자를 위한 ‘골드빌리지’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청년·신혼부부 등을 중심으로 공공주택 공급이 이뤄졌는데 고령화가 본격화된 만큼 은퇴자와 고령자에 대한 주거 서비스도 필요하다”며 “아직 구체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그런 분들이 필요로 하는 여러 시설을 갖춘 골드빌리지를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주거안심종합센터(가칭)’도 확대할 예정이다. 김 사장은 “시민을 대상으로 원스톱 주거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거안심종합센터를 오는 2024년까지 각 자치구에 한 곳씩 개소할 계획”이라며 “개인별 상황에 맞춘 주거 상담과 지원,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시민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공익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점에 ‘SH 사장’이라는 직(職)이 시민운동과 비슷하다고 김 사장은 말했다. 김 사장은 1997년부터 경실련에서 활동을 시작해 지난해 11월 SH 사장에 취임하기 직전까지 활동을 이어왔다. 김 사장은 “시민운동은 많은 시민을 설득해야 하는 활동이다 보니 매일 공익만을 생각했는데 SH도 다를 게 없다. 다만 시민운동을 할 때는 영역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분야를 막론하고 주장을 펼 수 있었지만 지금은 SH 사장으로서 내 역할이 있어 그 영역이 제한된다”며 “예전보다 영역이 줄었으니 오히려 한 가지 분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더 잘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김헌동 SH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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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충남 부여 △1981년 쌍용건설 입사 △199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책사업 감시단장 △2004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아파트값거품빼기본부장 △2016년 정동영 국회의원 보좌관 △201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동산건설개혁본부장 △2021년~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