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정권 교체 지지율이 50%를 넘고 있다. 문재인 정부 5년간의 실정에 대한 국민적 절망과 분노·배신감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유권자들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무너진 법치와 상식을 회복하고 국민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을 지도자를 선택할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정치철학자로 명성이 높은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는 21일 경기도 용인시의 개인 서재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폐단은 시민들이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상대 진영의 의견을 배척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현 정부에서 ‘민주적 통제’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법이 비판 세력에 족쇄를 물리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정당성을 잃었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낙후된 한국의 정치 문화를 개혁하는 방안에 대해 “당내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분출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 5년을 총평한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달성된 ‘1987년 체제’ 이후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촛불 혁명 덕에 출범한 만큼 역대 어느 정권보다 정치적 자산은 많았지만 사회 통합에 주력하기보다는 적대적인 진영 정치로 치달았다. 최악의 악정(惡政)이며 최대의 실패다.
-국정 운영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다고 보는가.
△정치 개혁을 통해 정치 구조를 개선해야 했다. 하지만 실상은 거꾸로였다. 민의를 대변한다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지만 ‘위성정당’을 만들어 거수기로 세우고 양당 체제를 공고화하고 입법 독재를 했다. 경제 문제도 심각하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대문명의 전환기에서 산업구조를 개편하는 중차대한 일을 제쳐두고 경제학 교과서에도 없는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을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일자리 참사를 낳았다. 현 정부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상태인데 ‘조국 사태’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용어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파시즘에 대한 우려와 경고를 여러 차례 하셨는데.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최고 권력자가 의회를 무시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려고 하는 순간 파시즘의 유혹을 받는다”고 했다. 단적으로 2019년 9월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 참석 일정을 마무리한 뒤 조국 전 법무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를 언급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영 대결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는데, 이를 기점으로 서초동 집회와 광화문 집회로 갈라졌다. 대통령이 의회를 건너뛰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것은 국민을 동원하는 전체주의 체제인 나치 정권과 닮았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부정과 불의의 의혹을 받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광장에서 집단의 힘을 과시한다면 파시스트 중우정치로 전락할 수 있다.
-1987년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운영되는 ‘1987년 체제’가 한계에 부닥쳤다는 지적도 있는데.
△1987년 체제는 제도적 측면과 정치 문화적 측면에서 나눠볼 수 있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권위주의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 체제로 전환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대통령의 임기를 제한하는 5년 단임제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핵심은 의회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해야 하는데 외려 여당이 대통령에게 휘둘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정치 문화적 측면에서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공존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전까지 산업화 세력 중심이었다면 1987년 체제를 기점으로 민주화 세력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박근혜 정부까지는 어느 정도 두 세력 간 균형이 이뤄졌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다시 양극단으로 나뉘며 진영 대결이 격화됐다. 갈라치기로 상징되는 분열의 정치가 일상화됐고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깊은 협곡이 생겼다. 1987년 체제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가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으니 이를 해소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맡겨진 사명이다.
-한국 정치의 낙후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치철학이 부족한 탓인가.
△한국이 개인이 없는 사회이며 질문이 없는 사회라는 진단이 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적이 있다. 집단주의·공동체주의가 강하게 뿌리내려 개인이 의견을 표출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얘기다. 당연히 좀처럼 비판하지도 않는다. 단적으로 이번 대선만 놓고 봐도 비전이나 어젠다·정책에 대한 건강한 토론은 전무한 상태다. 정치라는 것은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비전을 통해 국민들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다. 당연히 규범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고 그것이 지닌 가치를 설명하고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권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공학적 사고만 있다. 정치인에게는 정치철학이 없고 시민에게는 비판 의식이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은 문화가 정치 선진화를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정치는 의견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한나 아렌트)”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궁극적으로 합의에 이르게 하는 것이 정치 본연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의 가장 큰 폐단은 시민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분출하지 못한 채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상대 진영의 의견을 배척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다원주의가 왜 중요한가.
△한 개인이 경제 문제에서 보수당을 지지하지만 젠더 문제의 경우 진보당에 동조하고 환경 문제는 제3지대를 선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개인의 관점에서 주제별로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획일화된 정치 성향을 강요하고 있다. 당연히 당내 민주주의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당내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 당장 양당 체제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당내 의사 결정 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젊은 세대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천 방식을 고민하는 한편 의사 결정 시스템도 민주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정권 교체 여론이 50%를 넘고 있는데 근본적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도덕적 우위를 내걸고 집권한 현 정권이 뿌리째 흔들린 결정적 계기로 ‘조국 사태’를 들 수 있다. 조국 사태의 핵심은 권력에 의한 도덕의 타락이고 붕괴이다. 입시 부정은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는 부도덕하고 불법적 행위임에도 집권 세력이 외려 공정을 외침으로써 ‘도덕적 도착(倒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도착’은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도덕이나 상식을 외면하는 운동권 세력의 행태에 국민들이 깊은 절망과 배신감을 느꼈다. 한발 더 나아가 다수 의석을 앞세워 법의 이름으로 입법 독주를 일삼으니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느꼈다. 결국 정권 교체를 원하는 국민들이 절반을 넘게 됐다.
-‘공정’이 우리 시대의 핵심 의제로 떠오른 배경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만큼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미국·영국·이탈리아에서는 공정이 이슈가 되지 않는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면 ‘공평성’이라는 화두를 꺼내지만 ‘공정’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 공정이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일까. 자산이나 소득 불평등도 있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관대한 편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잘사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팀, 조국 사태 등은 젊은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공정을 배신했다. 절차의 불공정성은 결국 게임 조건의 불공정성으로 이어진다. MZ세대가 부르짖는 공정의 문제는 기회의 불평등에 있다. 자격 없는 사람이 기회를 갖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법의 지배’가 ‘법에 의한 지배’로 대체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의 지배’는 정당성의 문제이고 ‘법에 의한 지배’는 합법성의 문제다. 사회를 통치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법이다. 법에 의한 지배를 피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법이 그 자체로 항상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법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기에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해 법률을 통과시키지만 소수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민주적 통제’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소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법률을 비판 세력에 족쇄를 물리는 수단으로 쓰면서 외려 정당성을 잃었다. 합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다.
-20대 대선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소득 불평등, 자산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에 따른 기후변화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 인류 공동의 과제를 고민하는 시발점이 돼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되고 서로 다른 의견이 존중되는 열린 사회가 돼야 우리가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해갈 수 있다. 이를 위해 무너진 법치주의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다. 역설적이게도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거치면서 우파와 좌파가 각각 저지른 적폐들이 희석되면서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고 본다.
He is…
1956년 경기도 동탄에서 태어나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니체 철학의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다. 아우크스부르크대 철학과 전임강사, 계명대 철학과 교수, 계명대 총장,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니체: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 ‘의심의 철학’ ‘불공정사회’ ‘개인주의를 권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