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니아 문제 해결을 위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나온 지 하루도 안 돼 초강수를 던졌다. 바로 친러시아 세력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분리 독립을 전격 승인한 데 이어 평화 유지를 명분으로 러시아군의 진입을 명령했다. 특히 돈바스 지역 내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통제하는 지역까지 친러 반군의 영토로 승인했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상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조치로 전면 침공의 바로 직전 단계까지 긴장 수위를 끌어올렸다는 관측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도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무력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돈바스 지역에서의 러시아군 공개 주둔은 그 자체로 ‘전면전’의 트리거가 될 수 있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이 미국과의 막판 협상을 앞두고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푸틴 대통령의 또 하나의 도박 아니냐는 분석도 적지 않다.
전광석화처럼 움직인 푸틴
푸틴 대통령은 21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한 후 수 시간 만에 두 공화국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돈바스 지역을 양분하는 DPR과 LPR은 지난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자신들도 독립하겠다며 이 지역의 친러 세력들이 만든 곳이다. 이들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영토의 3분의1만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크렘린궁은 22일 “DPR과 LPR의 독립 승인은 2014년 이들이 독립을 주장했을 때의 경계선을 인정한 것”이라고 밝히며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통제하는 지역까지 친러 반군의 영토로 인정했다.
푸틴 대통령은 두 곳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공개적으로 러시아군을 파병할 명분을 마련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로이터통신은 대규모 군사 장비 행렬이 도네츠크를 지나 이동하는 장면이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이런 러시아의 행보를 주시하면서도 일단 이를 ‘침공’으로 단정 짓는 데 주저했다. 외신들은 “미국 정부가 (이번 조치 자체를) 레드라인을 넘은 것으로 보지는 않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실제 백악관 당국자는 “러시아는 지난 8년 동안 돈바스 지역에 병력을 배치해왔다. 이제야 공개 인정을 한 것”이라면서 “러시아가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 관찰하고 평가해 그에 따라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푸틴, 신냉전 주도권 노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 담화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했다. 그는 “소비에트연방이 없었다면 독립국 우크라이나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며 “더 정확히는 볼셰비키, 공산당 러시아가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잉태한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편에 서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 “나중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해도 달라질 게 없다” 등의 날 선 발언도 내놓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냉전 시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라고 짚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도 “푸틴 대통령이 유럽을 시작으로 잘못됐다고 보는 것들을 바로잡고 러시아를 다극 체제 중심에 놓으려고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의 안전 보장 요구를 거절한 서방을 향해 “러시아는 보복 조치를 취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다만 러시아가 키예프 등에 포격을 감행하는 등 전면전에 나설지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전면 공격 시 유럽 전쟁으로 비화하고 국제 제재도 뒤따라 푸틴 대통령도 부담이 크다. 러시아의 돈바스 진입은 군사적 행동의 한계선을 넘나들면서 미국의 반응을 떠보고 더 많은 양보를 노린 푸틴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러 외무장관 회담서 돌파구 마련할까
미국은 백악관, 국무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모든 채널을 통해 푸틴 대통령의 행보를 강력히 비판하고 국제사회의 결집을 호소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는 이날 저녁 긴급히 소집된 유엔 안보리에서 푸틴 대통령의 이른바 ‘평화유지군’ 주장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누구인지 알고 있다”며 “이는 허튼소리”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도 러시아와의 협상 외에는 뾰족한 수단이 없다. 이와 관련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24일 유럽에서 만나 담판을 벌일 예정이다. 푸틴 대통령이 또다시 상황을 극한까지 몰고 간 가운데 결국에는 미국의 양보를 얻어낼지 주목된다. 백악관은 이날 미러 정상회담 진행 여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