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슈퍼스파이크(대폭등)’가 탈원전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문재인 대통령을 움직였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사실상 현 정권의 금기어로 묶어뒀던 ‘원자력발전’의 봉인을 스스로 풀었다.
문 대통령은 25일 청와대에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 회의를 주재하며 “원전이 지속 운영되는 향후 60여 년 동안은 원전을 주력 기저 전원으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며 “다만 적절한 가동률을 유지하면서 원전의 안전성 확보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사실상 임기 말 탈원전에 대한 ‘이념적 함정’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날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의 단계적 정상 가동 점검을 지시한 만큼 늦춰졌던 원전 준공과 가동도 가시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 원전의 상업 가동은 한참 늦어졌다. 신한울 1·2호기의 경우 지난 2011년 건설허가를 받을 당시 각각 2017년 6월, 2018년 4월에 상업 운전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신고리 5·6호기 역시 각각 지난해 10월, 올해 10월 상업 운전이 목표였지만 3년 가까이 밀렸다. 신한울 1호기의 경우 5년 전 상업 가동이 시작됐어야 했는데 탈원전 정책이 발목을 잡았다.
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촉발되자 원전 활용을 확대했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외쳤지만 외부 환경은 원전의 필요성을 높인 것이다. 실제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지난달 원전 이용률은 89.4%로 4년 전 1월 이용률(56.2%) 대비 33.2%포인트 상승했다. 동절기 전기 수요가 늘어난 지난해 12월의 91.8%에 이어 문재인 정부 들어 월간 기준 두 번째로 높다. 지난달 기준 1㎾h당 발전단가는 원자력이 61원 50전으로 LNG(206원 20전)는 물론 석탄(135원 50전), 석유(215원 50전), 연료전지(151원 20전) 등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높다. 지난달 1톤당 액화천연가스(LNG) 현물 수입 가격이 전년 동기 대비 3배가량 증가한 1136.7달러로 역대 최고를 경신한 상황에서 원전 가동 확대는 불가피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몽니로 신한울 1호기(1.4GW) 가동이 늦춰진 것 또한 연료비 부담을 늘렸다.
에너지 안보 수급 문제도 문 대통령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한국의 에너지 해외 의존도는 93% 수준이다. 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에너지 자립’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이날 언급처럼 원전을 충분히 활용할 경우 국내 에너지 자립도는 높아진다. 원자력은 발전 단가 중 우라늄이 차지하는 비중이 8%에 불과하고 나머지 92%는 한국 기술로 구축된 발전 설비 등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또 원전 1기를 5년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연료 저장 공간은 20㎡에 불과해 기화 등의 문제가 있는 가스나 적재 공간이 많이 필요한 석탄 대비 보관이 용이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독일·호주·카자흐스탄 등 10개국에서 15년 단위 장기 계약으로 우라늄 원석을 수입하고 있으며 농축 우라늄은 프랑스·영국·러시아 등 4개국에서 20년 장기 계약으로 구매해 수급이 안정적이다.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등이 우라늄을 ‘에너지무기화’한다 해도 수급처가 다양한 만큼 큰 문제가 없는 셈이다.
원전은 문 대통령이 지난해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6)에서 언급한 ‘탄소 중립’ 달성에도 큰 역할을 한다. 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오는 2030년까지 원전 11기의 설계 수명을 연장해 계속 운행할 경우 발전 부문에서만 40.3%의 탄소 감축이 가능하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 특별 보고서는 화석연료를 파격적으로 줄이고 적극적인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2050년까지 원자력을 2010년 대비 2.5~6배 늘려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IPCC에 따르면 태양광발전의 생애 주기 탄소배출계수는 1㎾h당 이산화탄소환산(CO2eq) 기준으로 48g(중간값 기준)인 반면 원전은 탄소배출계수가 12g에 불과하다. 원전이 태양광발전 대비 4분의 1 수준의 탄소만 배출하는 셈이다.
정부는 지난달 LNG 가격 급등에 오히려 석탄발전을 늘리기도 했다. 지난달 석탄발전량은 1만 7756GWh로 전년 동기의 1만 6740GWh 대비 늘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이달까지 미세먼지계절관리제에 따라 전체 53기 석탄발전소 중 8~16기를 가동 중지하기로 했지만 지난달 석탄발전량은 관련 제도 시행 전인 지난해 11월(1만 5289GWh) 대비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반면 해외에서는 원전 확대로 에너지 가격 급등에 대응하는 한편 탄소 중립 달성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모습이다. 실제로 미국과 프랑스·중국 등은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원전 확대를 천명했으며 산유국인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원전을 가동하거나 신규 가동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또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일(현지 시간) 원자력발전을 그린택소노미에 포함하는 내용의 규정안을 발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