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한 후,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연소 큐레이터로 미술계 입문했다. 영국 런던시티대 석사, 에식스대 박사를 끝낸 ‘천재 소녀’는 유럽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영국의 국립미술관 격인 테이트갤러리에 입성한 최초의 동양인 큐레이터가 됐다. 이후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을 지냈고, 지난 2019년 영국을 시작으로 네덜란드·미국·싱가포르로 이어진 ‘백남준’ 회고전을 기획한 이숙경(52) 테이트모던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다. 내년 4월 개막하는 제14회 광주비엔날레는 지난해 말 그를 예술감독으로 지명했다. 광주비엔날레가 한국인 단독 예술감독을 선임하기는 지난 2006년 김홍희 이후 16년 만이다.
“민주화운동 등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정신을 중심으로 동시대 미술을 연결하고자 합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정신의 시작이 아니라 광주정신이 분출된 것입니다. 광주정신을 탈국가적, 탈시대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볼 것입니다.”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 감독은 28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시계획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내년 광주비엔날레는 세계 작가들이 광주의 역사를 소재로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광주정신을 재조명하는 장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를테면 마야족 후예인 MZ세대 멕시코 작가가 진정성있게 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는 억압과 저항, 정의와 같은 문제로 연결되면서 새롭게 광주정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영국에서 20년 넘게 활동해 스스로가 ‘이주민 큐레이터’인 그는 개인 경험을 기반으로 비서구권 시각을 담은 ‘탈국가적 큐레이팅’ 방법론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테이트모던에서 ‘현대 테이트 리서치센터: 트랜스내셔널’을 이끌면서 국가·국경 초월적 이상을 탐구하는 중이다.
“지역과 세계를 뛰어넘는 개념을 생각해오던 중,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각종 환경문제까지 맞닥뜨리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국경을 초월해 지구라는 ‘행성적 시각’의 큰 틀에서 보기를 요청합니다. 자본주의와 근대주의가 제시한 글로벌리즘의 개념에서 벗어나, 인류를 하나의 생물종이자 지구 공동체로 보고자 합니다.”
이 감독은 “글로벌리즘이 기준을 동일화하려는 평준화의 개념이었다면 트랜스내셔널은 그 기준을 버리고 수평적으로 보자는 것”이라며 “지구별에서 함께 사는 우리 인류가 위계의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행성적 시각”이라고 설명했다. 국경을 봉쇄해도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차단하지 못하는 현실, 다른 지역에서 자행된 환경오염이 지구 반대편의 재난으로 돌아오는 환경 문제 등이 이 같은 인식을 견고하게 했다. 이를 어떻게 전시로 풀어낼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지역적, 문화적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류의 유사성을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 예를 들면 우리의 노장사상과 호주 원주민의 코스몰로지(우주관) ,남미의 세계관 등을 펼쳐 보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공통분모를 찾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이 감독은 “행성적 시각의 담론을 이야기하지만 관객에게는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전시여야 한다”면서 “작품 앞에서 감동을 받고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며 사고의 전환, 시각의 확장을 주는 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이 감독은 이번 주 출국해 오는 9일 개막하는 시드니비엔날레를 돌아보고, 이내 3월 중순에는 백남준 순회전의 마지막 전시가 열리는 싱가포르에 들렀다 다음 달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로 향한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는 내년 4월 7일부터 7월 9일까지 역대 최장기간인 94일 동안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