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한 지 140여 일이 지났지만, 안호상(사진)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여전히 높고 험한 산 앞에 있다”고 했다. 저 멀리 정상은 보이지만, 도달할 길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이 막막함의 표현이었을까. 안 사장은 지난달 21일 취임 후 첫 공식 석상이었던 ‘2022 세종 시즌’ 발표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예술 경영자들이 세종문화회관에 와서는 산의 중간까지도 못 올라가고 조난당했다고 봐요. 저 역시 길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문화 콘텐츠의 형태와 관련 플랫폼의 빠른 변화 속에 극장의 운신 폭은 점점 좁아지는 상황. 예술의전당과 서울문화재단, 국립극장 등에서 활약해 온 전문 극장 경영인은 어떤 묘안으로 ‘위기의 극장’에 새 숨결을 불어넣을까. 지난달 25일, 봄 시즌 개막 준비가 한창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안 사장을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취임 일성에서 거창한 계획과 숫자로 포장한 자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임 사장이 보는 세종문화회관의 입지와 극장을 둘러싼 환경은 엄중했다. 안 사장은 “과거 세종문화회관의 경쟁자는 다른 극장뿐이었지만, 코로나 19 이후 넷플릭스를 비롯한 디지털 플랫폼이 콘텐츠를 전달하는 강력한 존재로 등장했다”며 “온라인 플랫폼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화하는 데다 소비자도 적응해 가고 있어 공연 콘텐츠나 극장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특정 장르에 특화된 ‘전문 공연장’도 늘어나는 추세라 세종의 경쟁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래서 핵심 목표로 내건 것이 바로 ‘제작 극장으로의 전환’이다. 극장 운영의 무게 중심을 기존의 대관에서 제작으로 옮겨 산하 6개 예술단(국악관현악, 무용, 합창, 뮤지컬, 연극, 오페라)의 공연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예술단체 역량 강화를 통한 제작 극장 전환’은 사실 전임 사장들도 취임 때마다 강조해 온 목표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듣는 이 역시 ‘달성될 리 없다’고 생각하는 외침이기도 했다. 안 사장은 제작 극장으로의 변신이 지금 세종문화회관의 구조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세종문화회관의 전체 인력과 1년 예산의 42%를 예술단이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간 예술단 공연의 관객 수는 전체의 12.3%에 불과했어요. 전면적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체질 개선을 위해 예술단의 공연 횟수와 국내외 창작진의 참여를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당장 이번 봄시즌(3월 26일~6월 26일)의 90%를 산하 예술단이 맡는다. 리스크가 큰 선택에 대해 안 사장은 “배수의 진을 친 것”이라고 했다. 관객 동원을 위한 외부 콘텐츠나 유명 아티스트 출연 같은 ‘안전판’을 애초 들어낸 것이다. 그는 “봄 시즌은 우리의 실체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동시에 관객이 세종에 어느 정도의 지지를 보내는지 파악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모든 역량을 투입해 공연을 올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제작 집단으로 나아가기 위한 세종의 견적서를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술단의 역량 강화가 ‘단원들의 자질 미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거듭 강조했다. 단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작품 세계나 영역을 만들지 못해 단원 개개인의 예술성을 끌어내지 못한 부분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는 기량도 뛰어나지만, 이전의 다른 예술가들이 표현하지 않은 영역을 찾아 새로운 감성을 불러일으켰기에 더 주목받은 것”이라며 “세종이 제작 집단으로서 해야 할 일도 뛰어난 사람들을 데려다 재현 예술만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반응할 새 자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국내 예술경영 1세대로 꼽히는 안 사장은 1984년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수많은 공연예술 현장에서 활동했다. 40년 가까이 공연장을 일터 삼아 드나들며 느낀 것은 극장은 그 도시의 문화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부조리와 상처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도시에서 극장은 지친 삶을 달래주는 공간이죠. 이 상관관계 속에서 극장의 역할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죠.” 이 같은 관점에서 안 사장은 다채로운 야외 공연을 확대할 방침이다. 최근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공원화가 진행되는 만큼 야외에서 시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향유의 기회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예술 경영가로 활약하며 기획의 대박도, 흥행 실패도 모두 맛봤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아무리 무모한 시도라도 관객의 기대가 있다면 해볼 만 하다’는 것이었다. 관객을 믿기에 이번에도 과감하게 도전에 나선다. “제가 정상까지 오르지 못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다음 사람에게 새로운 길 하나 개척해 남겨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