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애플 등 러시아 철수하는데…韓 기업들 '어쩌나' [뒷북비즈]

구글·GM·포드 글로벌기업 러시아 철수
삼성·LG·현대차, 러시아 비중 높아 고민
해운사 운항중단·정유사 수입 다변화 시도




애플(스마트폰)에 이어 인텔(반도체), GM(자동차), 이케아(가구) 등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 철수를 선언하면서 러시아 사업을 영위하는 국내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를 응징하는 차원에서 영업·판매 중단 조치를 취하고 있어 동참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섣불리 사업 중단을 선언할 경우 비즈니스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위험 부담도 크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로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처한 셈이다.


5일 외신과 산업계에 따르면 인텔과 AMD 등 반도체 기업들은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대한 제품 판매를 중단했다. 인텔은 성명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며 이번 전쟁으로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에서 15%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애플은 전면 철수 결정을 내렸고 구글과 볼보·GM·포드·나이키 등 여타 글로벌 기업들도 ‘러시아 엑소더스’ 전선에 합류했다.


국내 기업들의 고민은 깊다. 미국 CNBC에 따르면 시장 조사 업체 CCS인사이트의 벤 우드 수석애널리스트는 “(애플 철수가) 삼성 같은 라이벌 회사들에도 틀림없이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기업 고위 임원은 “애플과 달리 삼성전자는 러시아에서 스마트폰, 가전제품, TV, 반도체 칩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의사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현대차그룹도 러시아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어 GM과 같은 행보를 보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 가운데 공식적으로 시장 철수나 현지 공장 중단을 결정한 곳은 없다. 현재 베도모스티 등 러시아 언론들은 자국을 보이콧하는 기업 명단을 기사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 남아 있는 한국 기업들에 대한 주목도 높아졌다. 러시아 BFM 방송은 “한국은 러시아에 대해 극히 제한적인 제재만 가할 것을 항상 주장해 왔다”는 알렉세이 마슬로프 전 러시아 극동연구소소장의 발언을 소개하며 남아 있는 한국 기업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한국 기업들은 이 같은 반응이 난처하다는 입장이다. 자칫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우호적인 기업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A기업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사들이 인도적 이유를 내세우며 러시아에서 철수하는데 우리가 잔류할 경우 글로벌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쉽사리 철수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기업 실적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할뿐더러 대러 제재가 언제까지 어느 수준의 강도로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둘러 철수했다가 10~20년 공들여 얻은 러시아 소비자들의 신용을 잃을 가능성도 높다. 가전 기업의 한 관계자는 “현재 제품 프로모션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고위 경영진이 이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이 겪는 어려움은 혼란스러운 현지 상황과 맞물려 깊어지고 있다.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현물을 사두려는 이는 물론, 노트북이나 TV 등의 수입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소비자들이 백화점이나 양판점·쇼룸 등으로 몰려들고 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S22나 애플 아이폰도 사재기에 제품을 보기 어렵다는 보도도 있다. 러시아 울리야놉스크의 한 양판점은 몰려드는 사재기 요구에 아이폰 13미니에 당초 4만 4990루블(정가 49만여 원) 가격표를 붙였다가 10만 4990루블(115만여 원)로 교체하기도 했다.


항공 업계도 러시아 항공편 운항이 불안해졌다. 대한항공은 이날 인천~모스크바 여객 노선을 10일과 17일 결항하기로 갑작스럽게 결정했다. 5일 오전 1시 기준으로 모스크바 공항에서의 연료 보급이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되면서다. 인천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를 경유한 뒤 유럽으로 가는 화물기는 이달 18일까지 모스크바 경유 없이 바로 유럽으로 향한다. 대한항공은 모스크바 경유 유럽행 화물 노선을 주 4회 운항하고 있다. 일단 이달 18일까지 선조치가 이뤄졌지만 향후 상황에 따라 추가 결항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동차 시장도 비슷한 사정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반도체 수급난으로 전시 차량이 부족한 와중에 전쟁까지 더해져 현지 시장은 패닉 상태다. 현재 현대차는 반도체 부족 문제로 지난 1일부터 러시아 공장을 멈춰 세운 상태다. 단체협약상의 휴일을 포함해 8일까지 가동을 멈춘 뒤 생산을 재개할 예정이지만 생산 중단이 이어질 여지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러시아에서 기아 20만 5801대, 현대차 17만 1811대를 판매해 현지 시장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시장점유율은 합산 24%에 육박한다.


오리온과 롯데제과·팔도 등 식품 기업들도 난감한 상황이다. 해외 매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고 현지 투자 규모도 막대해 당장 철수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식품은 일상과 직결된 소비재인 만큼 보이콧을 할 경우 현지 소비자의 거센 반감으로 이어져 사태가 가라앉은 후 불매운동의 표적이 될 수 있다. C기업 관계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도 “수년간 키워온 시장인 만큼 생산 중단 같은 조치를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은 “삼성전자나 현대차와 달리 애플은 러시아 현지에서 직접 제품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판매 중단을 하더라도 입는 피해가 적다”면서 “국내 기업들이 해외 기업들처럼 독자적인 판매 중단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해운과 상사 등 B2B(기업간거래) 사업을 펼치는 한국 기업들도 고민이다. 현재 HMM과 장금상선·고려해운 등 주요 선사들은 러시아 운항 노선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다수 해외 선사들이 러시아로 향하는 배를 멈춘 상황에서 한국 수출 기업들의 발이 없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중단 여부를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우크라이나에 곡물 수출 터미널을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전쟁 중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될까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30년까지 글로벌 10대 식량종합회사에서 오른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계획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내 기업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다”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글로벌 공급망 체계를 아시아·남미 등으로 다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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