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이 반도체, 배터리, 6세대(6G) 이동통신 등 미래 먹거리 분야에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계약학과 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차세대 기술 ‘초격차’는 핵심 인재들이 이끌어가는 만큼 걸림돌이 되는 제도의 개선으로 기술 인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SK·LG 등 국내 대기업들은 사업 분야별 핵심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국내 명문 대학교와 손잡고 계약학과 설립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수 학생들의 취업을 보장해주면서 장학금까지 지원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내세우는 점이 눈길을 끈다.
지난 1월 삼성전자는 고려대와 6G 등 차세대 통신 기술을 다루는 ‘차세대통신학과’를 오는 2023년부터 채용 연계형 계약학과로 신설하기로 했다. 이 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졸업 후 삼성전자 입사가 보장된다. 삼성은 재학 기간 등록금 전액과 학비 보조금을 산학장학금으로 지원한다.
반도체 사업이 주력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채용 조건형 계약학과인 ‘반도체시스템공학과’도 설립했다. 올해부터 5년 동안 500명 내외 학생을 양성한다. 포항공과대(POSTECH)와도 내년부터 반도체공학과를 설립해 매년 신입생 40여 명을 받을 계획이다.
배터리 사업에 한창인 삼성SDI는 서울대와 손잡고 2031년까지 10년간 총 100명 이상의 석·박사 장학생을 선발한다. SK그룹도 반도체·배터리 분야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대학교와 협약을 맺는 사례가 늘고 있다. SK온은 1일 성균관대와 배터리 계약학과 프로그램 개설 업무 협약을 맺고 인재 육성에 나섰다. 학비 지원은 물론 SK온 연구원들의 특강, 해외 포럼 참가와 단기 연수 프로그램 혜택 등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포부다. 또 SK온은 지난해 10월 울산과학기술원(UNIST)과 배터리 산학 협력을 시작했다.
그룹 내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SK하이닉스도 지난해부터 고려대에서 채용 연계형 반도체공학과 운영을 시작했다.
LG그룹의 계약학과 신설 역시 눈에 띈다. 배터리 사업이 주력인 LG에너지솔루션은 고려대와 배터리·스마트팩토리학과를 개설했다. 인공지능(AI) 기반 배터리 소재 및 차세대 배터리를 개발하는 ‘배터리공학’ 분야, 스마트팩토리보안 등을 연구하는 ‘스마트팩토리’ 분야다. 회사는 이에 앞서 연세대와도 협력 관계를 맺고 계약학과를 설립하기로 했다.
대기업들이 계약학과 설립에 속도를 내는 가장 큰 이유는 ‘초격차’ 사수다. 우리나라 업체들은 글로벌 반도체·배터리 분야에서 업계를 선도하는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기술 격차를 이어갈 인력 확보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우수 인력 영입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반도체 석·박사급 고급 인력 부족은 연간 1500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기술 우위에 경고등이 들어오고 있다. 이에 각 회사들이 한 명의 우수 인재라도 빨리 확보하기 위해 계약학과 설립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국내 업계에서는 업계 노력 외에도 정부의 화끈한 기술 인력 양성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그중에서도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른 지역 대학 정원 제한은 수도권에 연구 인프라가 몰린 기술 기업들의 인력 확보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정배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회장(삼성전자 사장)은 지난달 16일 열린 반도체 기업 간담회에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서 이기려면 우수한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며 “대학의 학생·교수 정원에 구애받지 않고 반도체 고급 인력이 양성될 수 있는 과감한 정책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