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구자들을 연구 현장에서 떠나고 싶게 만들고 있습니다.”(후베르트 마르클 막스플랑크협회장·2002년)
“우리는 국가 신산업 개발에 더 이상 제공할 것이 없습니다.”(한스외르크 불링거 프라운호퍼협회장·2002년)
“우리는 연구와 개발·혁신에서 퇴보하고 있습니다.”(카르스텐 크레클라우 독일산업연합회 상임이사·2003년)
2000년대 초 독일에서는 독일의 과학기술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는 과학기술계 리더들의 고언(苦言)이 잇따랐다. 이 시기에 독일은 외형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로 평가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독일 과학기술의 퇴보를 우려한 성찰의 목소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비 투입, 블룸버그 등 각종 글로벌 혁신 평가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중반부터 이와 비슷한 이슈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연구개발(R&D) 성공률은 99.5%에 이르는데 신산업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국내 과학기술 혁신 주체들이 파편화되어 연구와 혁신이 분리돼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다.
독일은 2000년대 초 과학기술 위기 경계론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결론적으로 독일은 외형적 보여 주기 식의 ‘거버넌스 혁신’보다는 내실 있는 ‘범부처 통합 전략’ 숙의(熟議)를 통해 연구와 혁신을 연계하는 ‘첨단 기술 전략’을 수립했다. 2006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매 4~5년 주기의 국가 프로그램으로 채택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전 세계 4차 산업혁명 기술 도약의 견인차 역할을 한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계획’도 이 프로그램에서 진행된 과제 중 하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독일 정부는 위기 상황 타개를 위해 ‘수직적이고 하향적인 의사 결정’보다 전문가 중심의 ‘혁신 대화’ 등 소프트한 정책 수단을 활용해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수렴했다. 이를 통해 독일 과학기술 위기의 본질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되기 어려운 구조적 환경’에서 기인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지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더 많은 자유(igniting ideas, more freedom for new ideas)’가 연구 현장에 가장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는 결국 독일 출신 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가 지난 1911년에 제기한 “우수한 연구자를 선임해 연구 수행에 관련된 모든 권한은 연구자에게 맡긴다”는 ‘하르나크의 원칙’과 같이 연구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연구 지원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위시한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응용 연구를 토대로 산업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해 2019년에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 3050선진국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인구 5000만 명)에, 또한 2020년에는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선진국이 됐다. 한국전쟁 이후 70년 만에 오로지 우리 국민의 우수한 혁신 DNA로 일궈 낸 기적의 결과였다.
유럽이 500년이 넘는 기초과학 역사 속에서 꾸준히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온 것에 비해 우리는 응용과학과 기초과학 연구를 함께 진행하면서 그동안 사실상 맞지 않는 옷에 몸을 맞춰 오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대한민국이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진정한 세계 일류의 선도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가 R&D 생태계의 자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근본적인 연구 환경 복원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토양에서 연구자들이 부담 없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미래지향적 연구에 몰입하며 다양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타율적이고 관리 중심의 위계적인 모든 요소를 덜어 내야 한다. 바른 연구 문화 확립을 위한 기본과 본질의 회복이 곧 진정한 혁신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