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길거리 정치’ 공약은 잊어라

문, 1호 공약 ‘적폐청산’ 거친 바람
정권 교체 열망 키운 부메랑으로
매표 선거판과 현실 국정 구분을
욕먹을 각오하고 공약 거품 빼야

권구찬 선임기자

“공약은 보기에만 화려한 전단지가 아니라 국민과 한 약속이자 스스로 다짐하는 굳은 맹세입니다. 정권 교체로 국민의 삶이 달라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약속을 지켜내고 맹세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권 교체’라는 표현을 본다면 얼핏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공약집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19대 대선 후보 시절 낸 공약집 발간사 일부다. 검사 윤석열을 정치인으로 변신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명의로 발간한 것이다. 철 지난 공약집을 꺼낸 것은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약속을 지켰는지 살펴보자는 게 아니다. 9일 치를 대선에서 누가 되든 공약을 그대로 이행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두렵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공약 이행은 일말의 단초를 제공한다.


387쪽에 이르는 문재인 후보의 공약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게 적폐 청산이다. 집권 세력은 주야장천 ‘적폐청산가’를 불렀다. 길거리 정치판에서조차 살벌해 보이는 구호를 현실 국정에 끌어온 결과는 참담했다. 국정 전반의 편 가르기는 나라를 심리적 내전 상태에 빠뜨렸고 국민들은 ‘내로남불’의 위선과 오만에 진저리를 쳤다. ‘최저임금 1만 원 달성’ 공약은 또 어땠는가. 2년 누적 29%의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 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부를 괴롭혔다. 서민 일자리가 파괴되고 ‘을과 을의 전쟁’을 부추기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국민연금 공약의 좌초는 차라리 다행이다. 문 대통령의 국민연금 공약은 ‘그대로 내고 더 받자’였다. 국민연금이 ‘국민 용돈’이라는 프레임은 선거판에 강렬했지만 국민 부담 늘리지 않고 더 받는 것은 마법 같은 일이다. 현 정부가 연금 개혁을 방치했다고 욕을 얻어먹고 있지만 개악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이번 대선은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전에 가렸지만 역대급 돈 풀기 경쟁의 연속이었다.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네 공약, 내 공약이 따로 없다. 공약 가계부를 내놓은 것도 아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요청하자 마지못해 내놓은 공약 재원이 300조 원 이상(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과 266조 원(윤 후보)이다. 이마저도 지역 공약 재원은 아예 누락돼 있다. 나라 살림 자연 증가분까지 고려하면 차기 정부의 재정지출 증가율이 해마다 두 자릿수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될 텐데, 무슨 수로 뒷감당을 할까. 그래도 증세는 없다고 하니 ‘그대로 내고 더 받자’는 국민연금 공약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대선을 치를 때마다 공약 좌판이 부풀어오른다지만 이번에는 질러도 너무 질렀다. 18대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후보의 131조 원, 19대 문재인 후보의 178조 원과는 비교가 안 된다. 10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김세직 법칙’에서 보듯 5년마다 성장률이 1%포인트씩 떨어지는데도 대선을 치르면서 공약 예산이 50%씩 팽창한다면 나라 살림이 거덜 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걸거리 정치와 현실 국정 운영은 구분돼야 한다. 국민에게 약속한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은 국민 신의를 저버리는 행태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표에 눈에 멀어 급조한 공약까지 지키려 하다가는 나라 살림을 망치고 정작 필요한 민생 지원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국정 운영에도 발목이 잡힐 수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대선 공약의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을 재검토하고 국정 우선순위를 따져 화려한 공약 전단지의 거품을 싹 걷어내야 한다.


문 대통령은 5년 전 대선 공약집에서 부정부패가 없고 공정한 세상, 일자리와 성장 동력이 넘치는 나라, 전국이 골고루 잘살고 출산·노후 걱정이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다. 누가 되든 역대 대선 승리자의 공약집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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