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 안 할래요. 못 들었어? (생존 확률이) 0.8%라잖아. 누가 장담해 내가 0.8인지 아닌지”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서른, 아홉’에 등장하는 대사다. 39살의 나이에 췌장암 4기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찬영(전미도 분)은 끝내 항암치료를 거부하다 사망해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만든다.
췌장암은 ‘진단이 곧 사형선고’라고 불릴 정도로 예후가 나쁜 대표 암종으로 꼽힌다. 최근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췌장암 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은 13.9%로, 전체 암 생존율(70.7%)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췌장암 환자 10명 중 8명 이상이 5년 안에 사망한다는 의미다.
의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췌장암의 생존율이 여전히 낮은 원인은 무엇일까. 췌장암을 이겨낼 방법은 없는 걸까? 류지곤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의 도움말로 살펴봤다.
췌장암은 췌장에 생긴 악성 종양성 질환이다. 다른 암들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발생 원인을 지목하기 어렵다. 노화, 흡연 경력, 만성 췌장염 등이 주요 위험인자라고 알려졌다.
췌장암은 유전자나 가족력에 따라 발병 확률이 크게 증가한다. 집안에 췌장암 환자가 2명만 돼도 췌장암에 걸릴 확률이 일반인보다 10배 이상 높은 고위험군에 속한다. 이런 사례를 의학적으로는 ‘가족성 췌장암’이라 불린다. 만약 췌장암에 걸린 가족이 있다면 발생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는 것이 좋겠다.
첫째, 췌장암의 생존율이 낮은 주요 원인은 조기 발견이 어렵다는 데 있다. 췌장암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다. 복통 등 환자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증상이 나타났을 땐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둘째, 수술이 까다롭다. 췌장암을 치료하는 최선의 방법은 수술이지만, 진단 시점에 수술 가능성은 20% 미만으로 낮기 때문이다. 3기는 암세포가 췌장 주변의 동맥까지 침범한 상태고, 4기는 암세포가 간 등 다른 장기로 원격 전이된 상태라 수술이 어렵다.
셋째, 재발 가능성이 높다. 다른 암은 1기에 발견해 수술하면 생존율이 95~100%까지 올라간다. 항암치료도 필요하지 않다. 반면 췌장암은 재발 가능성이 높아 수술 후 5년 생존율이 30%에 불과하다. 대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수술 후 항암치료를 하게 된다.
췌장암의 가장 흔한 증상으로는 복통, 식욕부진, 체중감소, 황달 등이다. 환자에 따라서는 일반적인 췌장질환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해 혈당을 조절하는 내분비기능과 소화효소를 분비해 지방 분해를 돕는 외분비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췌장이 손상되면 혈당 조절에 문제가 생겨 당뇨병에 걸리거나, 지방 소화가 어려워져 기름진 변을 볼 수 있다.
췌장암의 대표적인 전조증상은 식욕 부진, 체중감소, 황달이다. 황달은 눈의 흰자나 피부가 노랗게 착색되는 증상을 의미하는데, 십이지장에서 분비된 담즙(쓸개즙)이 딱딱해진 췌장으로 인해 내려오지 못하고 혈중에 고여 발생하게 된다. 황달은 비교적 조기에 나타나므로, 황달이 생겼을 때 발견된 췌장암은 수술 가능성이 높다.
췌장암이 의심되어 병원에 내원하면 1차적으로 CT 촬영이 권고된다. 만일 나이·가족력·흡연·당뇨병 등 위험인자 여부를 고려할 때 췌장암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판단되면 복부 초음파를 진행하기도 한다. CT 결과 만으로 췌장암 여부가 불확실할 경우, 추가적으로 MRI 검사를 통해 의심되는 부분에 대한 정밀 검사를 진행할 수 있다.
췌장암 치료법은 사용하는 약제의 종류에 따라 △5-플루오로우라실(5-FU) 외 2개의 약제를 사용하는 3제 요법 △젬시타빈·아브락산을 사용하는 2제 요법으로 구분한다. 3제요법은 한 달에 두 번 2박 3일간 입원해 항암제를 투약하는 치료법이다. 반면 2제 요법은 투약시간이 30분 정도로 짧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 투약이 이루어진다. 약물에 내성이 생겨 효과가 떨어지면 다른 치료법으로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이 때 사용되는 항암제가 세포독성 약물이어서 간혹 정상세포를 공격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췌장암의 경우 항암제 장기 투약으로 인해 신장·신경계 이상이 생길 수 있다. 손·발끝이 저리고 아프거나, 평소 자연스러웠던 걷기·수저 사용 등의 동작을 수행하는 데 불편을 느끼는 것이 대표적 증상이다.
최근 5년간 항암제의 발전으로 췌장암의 치료 성적도 개선됐다. 췌장암 4기 환자의 평균 생존 기간이 6개월에서 12~14개월까지 증가했다. 수술이 어려운 환자가 항암치료를 통해 수술이 가능할 만큼 호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정 유전자 변이를 보유한 사람은 ‘3제 요법’에서 치료 효과가 좋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환자 100여 명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ERCC6 유전자 유무에 따라 3제 요법의 치료 효과가 3배 이상 차이가 나타났다. 더욱 효과적인 항암 치료법을 선택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췌장암은 식욕 부진을 유발하는데, 여기에 항암치료까지 더해지면 입맛이 더욱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식사를 거르면 체력이 낮아져 항암제 부작용이 발생하기 쉬우므로 균형잡힌 식단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 중인 췌장암 환자에게 식욕 촉진제를 처방할 만큼 식이요법이 중요하다. 탄수화물·지방질을 피하고 단백질 위주로 섭취하되, 가까운 동네 의원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아미노산’ 영양제를 맞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평소 췌장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싶은 이들은 음주와 흡연을 절제해야 한다. 음주와 흡연은 췌장암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성 췌장염의 발병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비만도 췌장에 좋지 않으므로 과다한 지방 섭취를 피하고 적절한 운동으로 표준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