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민의 경알못’은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0년 넘게 경제 기사를 썼지만, 여전히 ‘경제를 잘 알지 못해’ 매일매일 공부 중인 기자가 쓰는 경제 관련 콘텐츠 입니다.
‘페트로 달러’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일까.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원유 일부에 대해 위안화 결제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실제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달러뿐 아니라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안보 전문가들은 ‘러시아-중국-이란’을 축으로 한 권위주의 진영과 ‘미국-유럽연합(EU)-일본-호주’ 등을 축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신(新)냉전’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도 일부 내놓는다. 사우디가 위안화를 통한 원유 결제를 검토할 만큼, 글로벌 형세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권위주의 진영 소속 국가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경제·에너지 부문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 ‘세계의 공장’이자 미국과 함께 G2로도 불리는 중국이 대표적이다. 영국 싱크탱크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오는 2030년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글로벌 1위에 올라설 것이란 분석을 내놓는 등 글로벌 경제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천연가스 또한 이들 국가의 생산량이 전세계 2, 3, 4위를 차지하고 있다. 2020년 기준 러시아가 705 Bcm(Billion cubic meter)의 가스를 생산했으며 이어 이란(234Bcm), 중국(195Bcm) 순이다. 미국의 천연가스 생산량이 960Bcm으로 세계 1위이긴 하지만 이들 3개국은 인근 수요지에 ‘파이프를 통해 가스(PNG)’를 공급할 수 있다. 반면 북아메리카에 자리한 미국은 PNG 대비 단가가 몇배나 높은 액화쳔연가스(LNG) 형태로 수출해야 해 글로벌 가스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단순 천연가스 매장량만 따질 경우 러시아의 글로벌 비중이 24.3%로 압도적 1위이며 이란(17.3%)이 2위다. 미국은 5.3%에 불과하다. 희토류 또한 2020년기준 중국의 매장량이 4400만톤으로 압도적 1위이며 러시아의 비중(1200만 톤)도 상당하다.
다만 사우디가 원유 수출시 위안화 결제 허용을 검토하는 것은 이 같은 국제질서 변화와 외에 미국을 석유 순수출국으로 변모시킨 ‘셰일오일’과 관련이 깊다. 미국이 최근 몇년새 석유 순수출국으로 변모하면서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사우디의 지위가 급하락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우디에게 군사적 보호막을 제공해 줄 이유가 최근 몇년 새 크게 낮아진 반면, 사우디는 이란의 부상과 같은 위협 때문에 미국의 도움이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자칫 ‘페트로 달러’ 체제 붕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속에서도, 사우디가 위험한 도박을 하는 이유다.
페트로 달러는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후에도 미국이 글로벌 금융패권의 쥐게 해준 핵심 동력이다. 1944년 연합국 대표들은 미국 뉴햄프셔 브레튼우즈에서 만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태환제’를 도입했다. 금 1온스를 35달러로 교환해주고 각국 통화는 달러에 연동되는 것이 브레튼우즈 체제의 골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또한 이 같은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탄생했다.
반면 196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정부의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며 달러 가치는 빠르게 하락하게 된다. 금태환제 중심의 달러패권이 흔들릴 수밖에 없던 상황이다.
당시 금태환 중지에 기반한 달러패권 붕괴의 방아쇠는 프랑스가 당긴다. 미국은 1940년 독일에 무력하게 패배하며 세계 2차대전에서 제역할을 하지 못한 프랑스를 종전 이후에도 계속 홀대해 왔다. 프랑스 또한 1956년 수에즈운하 소유권을 갖기 위해 영국과 중동에서 일으킨 국지전에서 미국이 이집트 편을 들었다는 점, 프랑스의 핵무기 보유 시도를 미국이 사사건건 반대한 것 등에 강한 불만을 가져왔다. ‘위대한 프랑스’를 꿈꾸던 샤를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이같은 프랑스 홀대책 및 달러화 가치 하락에 대한 반발로, 미국과의 무역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계속해서 금으로 바꿔간다.
이후 미국의 눈치만 보던 여타 국가들도 프랑스의 행동에 자극을 받으며 금태환 요구를 잇따라 하게되자 1971년 리차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금태환 중지를 선언하게 된다. 1819년 영국에서 시작된 금태환제가 150여년만에 종언을 고한 셈이다. 금(金)에 연동되며 일정 가치를 인정받았던 달러는, 결국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미국의 달러 패권에 대한 세간의 불안도 커져갔다.
미국은 1974년 발생한 ‘1차 오일쇼크’에서 해법을 찾았다. 당시 이스라엘과 중동전쟁을 벌이고 있던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 하기 위해 석유 감산에 나선다. 이에 따라 석유의존도가 컸던 서방 주요국들은 두자릿수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하며 신음했으며, 우리나라 또한 1973년 12.8%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이 2년만에 6.6%로 반토막 나기도 했다. 가스, 원자력, 신재생 등 대체 에너지원이 많은 지금과 달리 1970년대 석유의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가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 했던 셈이다.
이에따라 미국은 석유와 달러를 묶는 정책을 고안해 낸다. 1975년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대금은 미국 달러로만 결제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이끌어 낸다. 대신 미국은 사우디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한다. 페트로 달러 시대는 이렇게 본격 시작된다.
이 같은 페트로 달러 시대의 균열을 가져온 국가는 역설적으로 미국이다. 미국은 2010년대 셰일오일 채굴 열풍으로 10년새 석유 생산량이 2배 가량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0년 미국의 석유생산량은 3억4610만톤으로 세계 3위에 불과했지만 2020년에는 7억1270만톤으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같은 기간 미국의 국제 원유시장 점유율도 8.6%에서 17.1%로 껑충 뛰었다. 반면 같은기간 사우디의 석유 생산량은 5억2270만톤에서 5억1960만톤으로 10년새 제자리 걸음을 했다.
특히 미국은 국경을 접한 캐나다에서 파이프 라인을 통해 원유를 상시 공급받아 2019년에는 ‘원유 순수출국’ 자리에 까지 오른다. 실제 캐나다는 2020년 2억5220만톤의 원유를 생산한 반면 자국내 소비량은 9810만톤에 불과해 미국의 핵심 원유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지역이 미국의 글로벌 정책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는 1970년대 대비 크게 낮아졌다. 실제 미국이 석유 순수출국이 된 2019년부터 양국간 관계는 파열음이 꾸준하다. 시아파의 수장이자 사우디의 숙적인 이란이 지난 2019년 사우디 석유시설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사우디의 동맹국인 미국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중국 견제를 대외정책 1순위로 추진중이었던데다 중동산 석유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만큼 굳이 사우디를 위해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암살사주’ 의혹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집권한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다. 바이든 행정부는 사우디가 참전한 예멘 내전 지원 중단을 선언한데 이어 이란과 ‘핵 협정(JCPOA)’ 복원 시도 등으로 사우디의 불안을 꾸준히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불안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사우디는 2019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중이 8.0%로 전세계에서 이스라엘(5.3%)과 러시아(3.9%)를 뛰어넘는 압도적 1위다. 사우디의 인구는 3500만명 가량으로 숙적인 이란(약 8500만명)의 절반에도 못미쳐, 값비싼 외국 용병에 국방의 상당 부분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우디의 GDP가 7000억 달러 수준으로 이란(1900억 달러) 대비 높기는 하지만,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또 사담후세인 정권 실각 후 이라크의 집권 세력이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바뀌는 등 중동에서 시아파 세력이 확대되는 것 또한 사우디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 때문에 사우디는 중동전쟁에서 맞붙었던 이스라엘과 ‘이란 견제’를 목표로 관계 회복까지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위안화를 통한 원유 결제라는 미국을 향한 사우디의 ‘협박’은 사우디가 처한 곤경을 잘 보여 준다. ‘탄소중립’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에너지 판도 변화에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의 가치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에너지 부국 사우디가 원전 건설을 추진중인 것 또한 이 같은 에너지 시장 변화 때문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도 불리는 사우디 국영기업 아람코의 가치 또한 이 같은 사우디의 상황을 잘 드러낸다. 아람코는 2019년 말 상장 직후 글로벌 시가총액 1위에 올랐지만 2020년 8월 애플에 1위 자리를 내주며 ‘8개월 천하’에 그친 바 있다.
반면 미국은 대(對) 중국 포위망 구축에 여념이 없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 리머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후유증 극복에 집중하느라, 중국의 급성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의 중국 견제는 본격화 된다. 2017년 출범한 미국 트럼프 정부는 기존 아시아·태평양정책을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Free and Open Indo-Pacific Strategy)’으로 확대하는 한편, 이듬해 미국 태평양사령부(USPACOM)를 인도·태평양사령부(USINDOPACOM)로 명칭을 바꾸며 중국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또 지난해 3월 미국·인도·호주·일본 등 4개국으로 구성된 쿼드(QUAD)의 첫 정상회의를 개최하며, 쿼드를 정상들이 참여하는 안보협의체로 격상시켰다. 쿼드는 미국이 구축 중인 중국 포위망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미국은 올 상반기 내에 ‘인도태평양 경제 틀(IPEF·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을 발표하며 중국 견제를 위한 포위망을 보다 단단히 한다는 방침이다.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경제제재 등의 조치만 내놓은 것 또한, 중국 견제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사우디의 몸값이 낮아진 것 외에 미국이 중동에 예전처럼 힘을 쏟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만큼, 사우디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한국 또한 향후 사우디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현 정부는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라는 뜻의 ‘안미경중(安美經中)’으로 대표되는 줄타기 외교를 5년째 지속해 왔다. 반면 미국과 중국 모두 최근 몇년 새 ‘우리 편에 서라’며 한국을 압박 중이다. 우리 정부의 선택에 따라 글로벌 정세 변화속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반도체가 향후 외교정책에서 향후 레버리지 역할을 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사우디가 석유를 무기로 국제정세 변화속에 살아남았던 만큼, 글로벌 1위를 굳건히 하고 있는 D램 등의 반도체가 그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반면 이 같은 반도체 경쟁력은 미국 눈밖에 날 경우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일본 반도체의 몰락이 이같은 우려의 근거가 된다. 실제 미국은 지난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화 가치를 급등시키며 일본 반도체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트린데 이어 이듬해에는 일본산 반도체 관세 부과를 골자로 한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 일본산 제품에 100% 관세를 부과했다. 결국 1989년까지만 해도 NEC·도시바·히타치 등 일본 업체가 나란히 1·2·3위(매출 기준)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한국이나 미국 업체가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TSMC에 이어 삼성전자가 세계 2위 규모의 점유율을 자랑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또한,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들여오지 못할 경우 7나노 이하의 미세공정 칩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확실한 레버리지가 되기 힘들다. 실제 ASML이 지난 2012년 미국업체 ‘싸이머’를 인수해 극자외선(EUV) 노광 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EUV 장비 수출 시 미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다만 일방적으로 미국 편을 들 경우 ‘포스트 반도체’라는 이차전지를 비롯해 한국이 육성중인 첨단 산업은 최소 몇년간 어려움에 놓일 수 있다. 이차전지 4대 구성품목인 양극재의 원재료 ‘전구체’는 중국 수입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앞선 중국과 일본간의 센카쿠열도 분쟁에서 드러났듯 중국이 희토류를 무기로 우리 나라를 압박할 수 있다. 실제 희토류 수급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전기차와 반도체 등 주요 품목의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
무역의존도가 59.9%(2020년 기준)로 주요 20개국(G20) 중 독일(67.0%)에 이어 2위인 한국 입장에서는, 사우디 보다 더욱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위안화를 통한 원유 결제 카드를 꺼내들며 미국을 향해 ‘나를 봐달라’는 사우디의 절박한 외침에 ‘강건너 불구경’만 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