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군사행동 축소' 카드 꺼냈지만…美 "속아서는 안돼"

서방, 평화협상 진전에도 '회의론'
러·우크라 "5차협상 건설적" 자평
바이든 "행동 볼때까지 예단 안해"
'병력 재정비 시간벌기 전략' 판단
美·유럽 '대러 제재 유지'에 합의
벨기에 등 러 외교관 대거 추방

29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서 한 여성이 전쟁으로 파괴된 버스 옆을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평화협상이 진전을 이루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지역에서의 군사 공격을 축소하겠다고 밝혔지만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군사 감축이 말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러시아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해당 지역에서 군사행동이 축소되더라도 이는 러시아군의 재정비를 위한 시간벌기용에 그칠 수 있는 만큼 섣부른 낙관론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현지 시간) 워싱턴포스트(WP)와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5차 평화협상 결과와 관련해 "지켜보겠다"며 "그들(러시아)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볼 때까지 예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평화협상에서 양측 대표단은 협상이 건설적이었다고 자평했으나 서방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성명에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을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존슨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날 통화하며 대러 제재를 유지한다는 데 합의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키이우 등에서의 군사 감축을 빌미로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벌려 한다고 보고 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누구도 러시아가 갑자기 키이우 인근에서의 군사 공격을 줄일 것이라는 러시아 측 주장이나 러시아군이 병력을 철수하고 있다는 보고에 속아서는 안 된다"며 "이는 실질적인 철수가 아니라 재배치"라고 강조했다. 군사분석가인 프랑스 전략연구재단의 프랑수아 아이스부르도 뉴욕타임스(NYT)에 "이는 러시아에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 물류 문제를 겪고 있는 지역을 통합하고 재편성할 기회"라고 진단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함락으로 목표를 변경하면서 군사 축소라는 카드를 내놓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킹스칼리지런던의 전쟁학 명예교수인 로런스 프리드먼은 "축소는 퇴각의 완곡한 표현"이라며 "러시아가 목표를 현실에 맞게 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키이우 점령에 실패한 러시아가 현실적으로 돈바스 등 동부 지역 점령이라는 ‘플랜B’로 옮겨가면서 마치 군사 축소라는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동부 지역에 대한 공세가 더욱 강화될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날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돈바스 해방이라는 (작전의) 주요 목표 달성에 노력을 집중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키이우 인근의 군사 축소 계획을 발표한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이 남동부 마리우폴 지역 등에 대한 군사 감축은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 같은 전망에 힘을 싣는다. WP는 푸틴 대통령이 이날 마크롱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무장 세력은 저항을 멈추고 무기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며 마리우폴에 대한 공격을 이어갈 것임을 시사했다고 전했다. 마리우폴은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장악한 도네츠크주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로 크름반도와 돈바스를 잇는 요충지다.


전문가들은 특히 러시아가 2014년 크름반도를 강제 병합한 후 꾸준히 돈바스의 분리주의자들을 적극 지원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비슷한 전략을 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외교관 출신으로 러시아에 주재했던 이언 본드 유럽개혁센터 소장은 "러시아가 전쟁을 포기한다는 데 대해 회의적"이라며 "우리는 이 같은 상황을 2014~2015년에 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이 단지 '일시정지(pause)'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앤서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러시아의 말과 행동 중 우리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 러시아가 하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잔혹 행위이며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AP통신 등에 따르면 네덜란드와 벨기에·체코·아일랜드 등 유럽 국가들은 외교관 지위를 이용해 정보 활동을 한 혐의로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각각 17명과 4명의 외교관을 추방하며 아일랜드는 러시아 고위 외교관 4명의 출국을 요청했다. 앞서 폴란드도 같은 혐의로 러시아 외교관 45명에 대한 추방을 명령한 바 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