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열 전달(Heat Transfer)을 공부하고 에어컨 시스템을 연구하면서 온도를 낮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더 나은 ‘제습 솔루션’을 개발하면 에너지 발생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고 확신해 창업을 결심했죠."
지난달 31일 성남시 경기 기업성장센터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백재현 에이올코리아 대표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습 신소재(MOF) 양산 기술로 글로벌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시장의 판도를 바꿀 스타트업이 됐다고 자부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백 대표는 석사 후 LG전자(066570) HAVC(Heating, Ventilation & Air Conditioning) 연구소에 근무하면서도 “협력 업체를 찾아 다니며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재직 중 박사 과정을 밟은 것도 새로운 솔루션을 개발하고 도입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안정적인 직장을 뒤로 하고 돌연 창업을 결심한 것도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연구소 재직 시절 전기차용 냉난방 모듈 개발을 맡게 돼 출장이 잦았는데 해외 일류 자동차 회사들이 차내 습도를 낮춰 에어컨 사용을 줄이고, 배터리 효율을 극대화해 주행거리를 늘리는 제습 솔루션 연구 및 상용화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음이 생겼다.
기존 에어컨 시스템을 차량으로 옮기는 데 급급했던 국내 기업들과 격차를 체감하면서 제습 기능에 초점을 맞춘 모듈 개발을 건의했지만 대기업의 의사 결정을 뒤집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직접 회사를 차려 제습 솔루션을 만들기로 했다.
백 대표는 “국내 에너지 소비의 60%는 산업, 21%는 건물, 19%는 수송 분야인데 건물·수송 분야에선 냉방 시스템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며 “제습 솔루션을 도입해 쾌적한 실내 환경을 조성하면 냉방 사용을 줄여 불필요한 열 에너지를 대폭 절감하고 환경 보호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창업 배경을 설명했다.
백 대표는 2017년 말 모교 캠퍼스타운으로 돌아가 퇴직금으로 회사를 차렸다. 그가 주목한 소재는 ‘MOF(금속유기골격 하이브리드 나노세공체)’다. 시중에 상용화된 제습제는 ‘제올라이트’라는 광물을 쓰는데 제습 성능 향상이 어렵고 일회용이라는 한계가 있다.
MOF는 나노 크기의 미세 구멍이 많아 제올라이트 대비 많은 양의 수분을 흡착하고, 약한 열을 가해 수분을 제거한 뒤 다시 쓸 수도 있다. 다만 광물인 제올라이트와 달리 MOF는 신소재여서 양산 체계를 갖추기가 쉽지 않다. 백 대표는 한국화학연구원에서 기술을 이전받으며 공정을 손수 개발해 창업 4년차에 ‘유무기 다공성 흡착제 및 제조방법’ 특허를 얻었다.
양산 기술은 사업성 확보로 이어졌다. 제습 및 환기 시스템을 구축해 에너지 효율이 높은 건물을 지어야 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주택도시공사(SH), DL이앤씨, SK에코플랜트, 호반건설 등을 고객사로 확보했다. 백 대표의 친정인 LG전자도 고객사 중 한 곳으로 실내 공기를 관리하는 공조 시스템에 쓰이는 장비를 에이올코리아의 MOF가 적용된 것을 채택한 것이다.
지난해 에이올코리아의 MOF 공장 설립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러브콜을 받았다. MIT 출신들이 창업한 ‘트랜세라’라는 미국 스타트업 역시 MOF를 연구·제조하는 기업인데 양산 기술이 없어 사업화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에이올코리아 측에 기술 제휴와 MOF 생산 및 판매를 요청한 것이다.
에이올코리아는 지난해 6월 사모펀드(PEF) 운용사 JCGI와 신영증권 등에서 22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경기도 화성시에 연 생산량 1000톤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다.
MIT 뿐아니라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RNS), 뉴질랜드 매시대 등이 MOF 생산을 요청하고 있다. 에이올코리아가 글로벌 반도체 위탁생산 1위 기업인 TSMC처럼 제습 소재 생산 플랫폼이 된 것이다.
백 대표는 후속 투자를 유치해 생산 규모를 연 2만톤 이상으로 늘린다는 구상이다. 그는 “위탁 생산으로 수익을 올릴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MOF 제조 노하우를 흡수하고 있다”며 “제습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조 및 양산 플랫폼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대표는 2030년을 염두에 두고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해 나간다는 구상이다. 다수 선진국에서 에어컨과 냉장고 등에 쓰이는 지구 온난화 유발 물질인 냉매 사용 규제를 적용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ESG를 이행하려면 냉방 및 냉장 효율을 극대화할 MOF를 사용하려는 수요는 커질 수 밖에 없다.
백 대표는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ESG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며 “에너지 절감 뿐만 아니라 식수, 의약품 분야에서도 MOF 활용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