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럽과 함께 가지만 유럽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연관되어 있지만 합쳐져 있지는 않다.”
수백 년간 이어온 영국의 외교노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윈스턴 처칠 전 총리의 발언이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럽이 하나로 뭉치기보다는 대륙 국가들이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기를 원했다. 서쪽 끝에 위치한 섬나라는 특성 탓에 유럽 본토에서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이 벌어져도 상대적으로 안전했고 유럽과 정서적 동질감도 적었기 때문이다.
대신 영국은 유럽 시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식민지 무역으로 이익을 얻거나 초강대국인 미국의 최대 우방국이 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 때문에 영국이 ‘하나의 유럽’에 반기를 들고 2016년 브렉스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단행한 것도 이른바 ‘위대한 고립주의’라는 뿌리깊은 유산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영국의 국민성이나 문화, 외교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팀 마샬의 신간 ‘지리의 힘2’는 7년전 나온 전작 ‘지리의 힘’에 이어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는 시간을 초월해 인간과 역사를 좌우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시대가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면서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다극화 시대가 되었지만 지리라는 물리적 실체는 그대로 남아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가령 마샬은 전작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리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구 소련 연방 국가들의 잇따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에도 만약 우크라이나에 산맥이 있어 서방이 러시아로 진격하기 어렵다면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행위의 반인륜성을 떠나 강경 민족주의자인 푸틴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저자는 30년 이상 발칸, 중동 등 전세계 분쟁 지역 30여 곳을 현장 취재해온 국제 분쟁 전문 문제 전문 기자다. 이번 속편에서도 지리를 렌즈 삼아 세계의 역사, 정치, 경제, 교역, 갈등과 분쟁 등의 전개과정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평평한 세계(flat world)’라는 말은 화상 회의를 하거나 항공기를 쉽게 탈 수 있는 일부 사람에게나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상의 80억명 인구 대부분은 산맥, 바다 등과 같은 물리적 공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예를 들어 청나일강 상류 쪽에 에티오피아는 12개의 커다란 호수와 9개의 큰 강을 무기로 이집트 농부들의 생존을 좌우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는 때로는 발목을 잡는 ‘적’이 되고, 때로는 ‘친구’가 되는 셈이다.
저자는 전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영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사헬 등 총 9개 지역과 국제간 새로운 각축장으로 떠오른 우주공간을 들여다본다. 호주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나라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3분의 1도 안 된다. 저 멀리 남쪽에 떨어져 있어 침략 위험이 적지만 말라카 해협, 순다 해협 등 주요 해상 항로가 봉쇄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호주가 남중국해 봉쇄, 파푸아뉴기니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 중인 중국에 위협을 느끼는 이유다. 호주는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협의체) 협력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하지만 중국의 경제 보복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란은 영토를 둘러싼 산맥 때문에 적이 침공하기 어렵다. 또 좁디 좁은 호르무즈 해협을 전략적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조차 가장 파병하기 꺼려하는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이란의 힘을 제약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로 고립된 탓에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에게 포위되어 있고 거대한 사막은 국민 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리스는 6,000개가 넘는 섬과 에게해, 지중해, 이오니아해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스가 번영하려면 해상 권력부터 장악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 같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그리스는 역사적으로 로마, 오스만 제국, 영국, 터키, 러시아 등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에 시달려 왔다. 최근에는 해저 가스전까지 발견되면서 강대국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이밖에 책은 동서양을 잇는 요충지에 자리잡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꿈꾸느라 외톨이로 전락한 터키, 내전 등 지금은 가장 문제가 많은 지역이지만 풍부한 수량 탓에 잠재력이 큰 에티오피아, 유럽 국가 중 산지가 가장 많아 부의 창출과 국민 통합을 저해 받으면서 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어려운 스페인 등을 담았다.
마지막은 바로 우주 공간이다. 책은 “우주가 또다른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가 될 수도 있다”며 고도 2000㎞ 안쪽의 저궤도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다른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으로 내다본다. 저자는 “20세기에는 핵전쟁 발발이 우리의 삶을 파괴할 위협이었다면, 이제는 ‘우주의 군사화’가 비슷한 위험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고 경고한다. 2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