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하느님 섭리 안에서”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얘기


한국 카톨릭교회의 최고령 주교인 윤공희(98) 빅토리아 대주교가 젊은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1930년대 일제 제국주의 시대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북한 교회의 모습을 복원한 책을 펴냈다.


최근 카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출간한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에서 윤 대주교는 한반도 격동기에 몸소 겪었던 사건들과 사제로 성장했던 과정을 기록했다. 지난해 3월부터 매달 윤 대주교가 구술한 내용을 권은정 작가가 책으로 담아냈다. 장긍선 신부와 조광 전 고려대 교수가 감수를 맡았고 평양교구 사무국과 왜관 성 베네딕토회, 광주대교구가 제공한 사진으로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전달한다.


윤 대주교는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덕원신학교를 수료했다. 해방 이후 월남해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963년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되며 주교품을 받았고 1973년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되며 대주교로 승품했다.


‘모든 순간,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왔다는 윤 대주교의 고백을 담은 이 책은 신앙과 민족 화해라는 교회의 소명을 다시 한번 묻는다. 이야기는 진남포본당에서 복사를 서던 윤 대주교의 8살 시절부터 시작한다. 일제의 가혹했던 전시 동원 체제에서 진남포는 군사 전진기지가 되며 신흥 도시로 급변한다. 진남포성당은 새 성전을 지어야 할 만큼 날로 교세가 확장했다. 어린 빅토리노가 복사를 서던 때는 메리놀회 스위니 신부가 진남포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때였다. 일제의 폐교 위협에도 학교를 지키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부님을 보며 어린 빅토리노는 사제의 꿈을 키워갔다.


윤 대주교는 서포 예비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첫걸음 떼고 푸른 숲 속에 있는 덕원신학교에 가면서 스승이었던 베네딕토회 신부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덕원신학교를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네가 원하는 게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냐”고 물었던 스승의 질문에 답을 찾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오는 길을 걸었다고 전한다.


그가 일제의 징집에 마음 졸이며 영장을 기다리던 중에 해방이 찾아왔다. 전쟁 물자로 몰수된 교회 종탑의 종소리를 대신해 해방의 기쁨이 수도원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얼마 전까지 일본군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신학교 운동장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소리소문 없이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않는 사제와 신자들이 갈수록 늘었다. 일제에 빼앗겼던 성전을 다시 짓는 일도 공산당의 방해와 압력으로 결국 중단됐다.


마침내 1949년 봄 한밤중에 수도원 주교 아빠스와 교장 신부, 수도자들이 연행되었고, 이윽고 덕원신학교에 강제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 신학생들은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막 차부제품을 받은 윤 대주교도 평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방학 때마다 찾아 뵙던 교구장 주교님은 피랍되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남으로 가 평양교구의 재건을 준비해야만 했다. 윤공희 빅토리노는 평양교구의 존립을 위해 1950년 1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다.


서울 도착 두 달만에 사제 서품을 받던 날 윤 대주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고 한다. “만약 북한에서 사제품을 받았더라면 당시 평양교구 소속 사제들의 운명처럼 공산 정권에 피랍되어 지금의 교황청이 발표한 ‘20세기 신앙의 증거자’ 명단에 올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그 때 순교하신 모든 분의 삶까지 살겠다고 다짐하며 신부 생활을 시작할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해 공산 치하를 경험하게 된다. 인민군 군의관이 되어 내려온 형님에게 강복을 준 일도 있었고, 9·28 서울 수복 전까지 구산 공소로 피신을 가 간신히 위험을 피하기도 했다. 그는 인민군들이 다시 북쪽으로 밀려나자 군종 사제들과 함께 평양교구 성당들을 방문해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도 한다. 윤 대주교는 당시 덕원수도원 주교 아빠스의 무덤을 참배하면서 조만간 다시 찾아와 수도원 땅으로 옮기려고 다음했지만 아직까지 그 시간은 오지 않았다고 진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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