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학이 처한 고뇌는 깊고 현실 여건은 매우 빈곤하다는 사실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그것을 이끌어 갈 능력과 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미래 문명의 변동에 대처할 구조개혁의 장애 요인이 대학 내부에 산적해 있다.”
김도연 울산대 이사장이 포스텍 총장 임기를 마친 직후인 2019년 말 11명의 사립대 총장들과 함께 펴낸 <총장의 고뇌 : 대학의 혁신을 말하다>의 서문 일부다. 김 이사장은 학령인구 감소와 등록금 동결로 인해 재정 결핍을 겪는 사립대 총장들과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함께 고뇌했고, 지금도 대학 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과 혁신 방안을 모색 중이다. 인터뷰에 앞서 ‘한국판 미네르바대학’인 태재대학 설립 자문을 하고 왔다는 그는 “캠퍼스 없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형태의 대학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고등교육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등교육 위기의 원인과 극복 방안을 묻는 질문에 김 이사장의 답은 간명했다. 그는 “대학이 반성하고 변화해야 한다”면서 “정부 재정지원 확대와 자율성 보장도 필요하지만 대학 스스로 바뀌고 혁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교수 정년보장제도를 폐지할 각오로 대학 구성원 스스로 희생하고 기득권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재정 지원의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등교육 위기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고등교육의 위기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선진국도 인구가 줄어들면서 대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학정원제도를 갖고 있어 더 문제죠. 학생 수가 줄어도 수도권 대학은 정원을 채울 수 있습니다만 지역 대학은 힘듭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말대로 지금 지역 대학은 급속하게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권에서도 벚꽃이 핍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수도권 대학들도 정원을 못 채웁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요. 우리나라 대학생의 78%가 사립대학을 다닙니다. 사립대학은 등록금으로 운영해 왔는데 14년 동안 동결됐습니다. 물가 상승 등을 고려하면 14년 전에 비해 절반 밖에 안되는 돈으로 대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 밖에요. 지역 대학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합니다. 아프다고 얘기하면 학생들이 안 오니까요.”
-등록금 동결 정책과 같은 정부 잘못이 크다는 말씀이군요.
“정부 정책도 그렇지만 대학도 대단히 잘못했습니다. 대학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없으니 지원을 못받고 있습니다. 사회와 대학은 부부관계 같은 겁니다. 요즘은 역할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 아버지는 직장에서 돈을 벌고 어머니가 집에서 아이를 키웠듯 사회가 대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대학은 인재를 키워서 사회에 내보냈습니다. 지금은 부부가 이혼한 상태입니다. 사회가 대학을 버렸습니다. 사회가 잘못했다고 하지만 대학도 잘 한거 없습니다. 대학이 사회와 다시 결합하려면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정부가 대학을 지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사학 비리로 인한 불신 때문입니다.
“대학은 사회 기준보다 훨씬 엄정한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포털사이트에서 사학을 치면 제일 먼저 연관 검색어로 뜨는게 사학 비리입니다. 사학 비리는 확실하게 끄집어내서 수술하고 처벌할 건 처벌해야 하지만 지원도 해줘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학은 잘하려고 노력하죠. 우리나라가 지금껏 사학의 덕을 봤잖아요. 나라가 어려워서 정부가 못할 때 개인이 나서서 고등교육을 책임진 거 아닙니까. 교육기관에서 발생하는 비리를 용납해서는 안되지만 일부 사학의 문제를 전체로 확대해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대학이 스스로 어떤 부분을 고치고 바꿔야 합니까.
“리더를 선출하는 방법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대학이 총장 직선제를 실시합니다. 직선제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폐해가 너무 큽니다. 대학은 확실한 리더가 끌고 가는 사회입니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리더가 돼야죠. 총장 임기가 4년에 불과하고 대부분 연임도 못합니다. 4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어느 대학이나 총장 임기가 2~3년 지나면 후임을 노리는 사람이 10명 가까이 나옵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떨어뜨려야 될 사람은 현직 총장이죠. 4년짜리 총장이 10년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과감한 혁신을 추진하겠습니까. 그래서 일본도 공립대학 총장 임기를 6년으로 바꿨습니다. 기본적으로 대학 총장 임기는 없는 것이 맞습니다. 리더십을 발휘해 대학을 발전시키면 10년, 20년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2년만에라도 그만둬야죠. 그래야 리더십이 생기고 팔로워십도 형성되는 겁니다.”
김 이사장은 선거 때만 되면 휴직하고 출마했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거나 공직을 맡기 위해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폴리페서’도 대학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린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또 입시비리 문제를 엄정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는 대학 당국의 일처리 방식도 신뢰를 잃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반도체 인력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수도권 대학의 정원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습니다만 지역균형발전을 저해하고 지역 대학의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역 대학은 어떻게 육성할 수 있을까요.
“선진국의 정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역에 일류 대학이 있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서울에만 일류 대학이 있고 모든 학생들이 서울에 오고 싶어 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우선 지역 대학에 투자를 해야죠. ‘서울대학교 10개 만들기’를 하자는데 좋다고 봅니다. 지역거점국립대에 대한 지원을 늘려 더 좋게 만들어야죠. 그런데 국민이 그렇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대학이 먼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을 그대로 하면서 투자를 더 하라고 하면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여지껏 투자가 없어서 발전하지 못했냐고 할 겁니다.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대학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제일 귀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기득권을 버려야죠.”
-구체적으로 어떤 기득권을 버려야 할까요.
“경북대나 전북대, 부산대가 설치 학과 등 편제가 똑같습니다. 50년 전에 만든 학과별 교육 체제부터 버렸으면 좋겠어요. 학과 구분 없이 뽑아서 2학년까지 교육시킨 후에 각자 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하도록 하는 겁니다. 공대 학생 중 60%가 컴퓨터를 전공하겠다고 해도 큰 문제 없습니다. 학생들은 현명합니다. 일부 쏠림이 있을 수 있지만 각자 알아서 저마다의 진로를 찾아갑니다. 대학이 변화하고 혁신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국가와 사회를 상대로 지원을 더 하라고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무작정 예산을 늘린다고 해서 서울대처럼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지원을 늘리면 좀 더 좋아지기야 하겠죠.
지역거점국립대야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만 중소도시의 작은 대학들이 처한 현실은 정말 심각합니다. 대학이 있고 없고에 따라 도시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생깁니다. 젊은이들이 있어야 생기가 돌죠. 1000명 정도 규모의 학교들이 죄다 문을 닫게 생겼는데 대학이 없어지면 도시가 활력을 잃습니다. 지역 소멸의 지름길이죠.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 수는 비슷한데 대학 수는 일본이 2배가량 많습니다. 일본은 정원이 1000명 안팎인 대학이 많고, 대부분인 지역 사립대학입니다. 정부가 사립대 교수 봉급의 절반을 지원합니다. 운영비와 경상비를 지원해 지역 대학이 유지할 수 있도록 돕죠. 소규모 도시에 있는 대학들이 문을 닫으면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고등교육을 위한 재정 지원이 늘어나야 한다면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재원이 아무리 많아도 가치가 없는 일에는 쓰지 않고, 적다고 해도 가치가 있는 일에는 반드시 써야죠. 우리나라는 고등교육에 대한 정부 재정 지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60%에 불과합니다. 반면 초·중등학교는 OECD 평균 보다 많죠. 요즘 웬만한 강남 유치원 학비가 월 100만원입니다. 대학 등록금 보다 많죠. 학생 수는 줄어드는데 초·중등교육에 쓰이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남아도는 실정입니다. 생각해볼 문제죠.”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제도를 개편해서 고등교육 재원으로 쓰자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교육계의 반발이 거셉니다. 고등교육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만.
“그래서 대학이 먼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가 깜짝 놀랄 일을 대학이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수 정년 보장을 폐지하는 겁니다. 미국에서 100여년 전에 테뉴어(tenure)가 생긴 것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는 교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죠. 요즘 정치적 발언의 자유가 없는 사회가 어디 있습니까. 교수 정년 보장은 사회에서 보기에는 아주 든든한 철밥통입니다. 심지어 게으르고 무책임한 교수까지도 보호하는 제도죠. 미국 조지아주는 지난해 28개 공립대학 교수들의 테뉴어를 없앴습니다. 이미 정년 보장을 받은 교수들의 권리까지 박탈했죠. 교수들이 반발해도 미국은 그런 리더십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 대학들도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메사추세츠공대(MIT)가 한때 조선공학과가 굉장히 잘 나갔는데 조선업종의 주도권이 일본과 한국으로 넘어가면서 학과를 없앴습니다. 국내 대학의 공대에서 학과 없앴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학생 정원을 줄였다는 얘기도 듣기 힘든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사회가 신뢰하지 않고 대학을 지원하자고 하지 않죠. 이런 상황에서 등록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등록금이나 입시 등 대학에 대한 자율성이 확대돼야 한다는 요구가 많습니다. 내달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의 대학 정책 기조도 자율성 확대인데요. 새 정부의 교육정책 방향에 대해 제언을 부탁드립니다.
"새 정부가 인공지능(AI)를 통한 교육혁명을 추진하겠다고 하는데 지켜봐야죠. AI로 인해 문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1750년부터 2000년까지는 산업문명 시대였고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제도도 산업문명 시대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었죠. 2000년부터는 디지털문명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를 맞아 어떤 인재를 양성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인 고민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바뀌었는데 계속 돌 다루는 법만 가르쳐서는 안되죠.
코로나 사태로 인해 교육 방식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2년 동안 위원으로 활동한 유네스코 국제미래교육위원회가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제목이 ‘함께 그려보는 우리의 미래 : 교육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Reimagining our future together : A new social contract for education)’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 하버드대가 최근 펴낸 미래 교수·학습 태스크포스팀 보고서 제목('Reimagining the Classroom, Enriching Content, and Expanding the Harvard Community')에도 ‘Reimagining’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코로나로 세상이 바뀌었으니 대학 교육도 다시 상상하고 재설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버드대 교수 82%가 앞으로 교수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했답니다. 대면 강의를 하면서도 짧은 디지털 강의 콘텐츠를 더 많이 만들어서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을 해야 한다는 거죠. 하버드대가 바뀔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고 변화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리더인거죠. 우리 교육도, 우리 대학들도 완전히 다시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