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노랑, 파란색의 구형 몸체를 가진 외계 생명체가 벽을 뚫고 나타났다. 눈인지 입인지 모를 구멍이 온몸을 뒤덮었고 줄무늬 다리가 꿈틀거리는 이들의 창조자는 판타지 영화의 세계적 거장 팀 버튼(64) 감독이다. ‘버트네스크(Burtonesque)’, 즉 팀 버튼 영화 특유의 어둡고 기발한 분위기를 뜻하는 고유한 수식어를 가진 그의 색채가 고스란히 드러난 신작이다.
50년에 걸친 버튼 예술의 발자취를 경험할 수 있는 ‘팀 버튼 특별전(The World of Tim Burton)’이 30일부터 9월 12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다.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특별전이 5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은 후 10년 만의 새 전시다. 캘리포니아예술대를 졸업한 버튼은 몽환적이면서도 괴기스러운 영화로 자신만의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영화감독인 동시에 2009년 뉴욕근현대미술관(MoMA)에서 전시를 연 예술가이기도 하다. 520여 점의 방대한 작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이후 세계 순회전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그 중 150여 점은 세계 최초 공개작이다.
버튼 감독은 개막에 앞서 29일 DDP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8.5m 신작 조형물에 대해 “10년 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내가 외계인처럼 느껴졌지만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이 아름다운 우주선 같은 공간에서 전시한다는 소식은 무척 기뻤다”면서 “새롭게 선보이는 이 작품은 이곳에서 영감받아 제작됐고 (외계인이 우주선 속에 와 있으니) 집처럼 편안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어릴 적 공동묘지에서 잔 적이 있을 정도로 혼자만의 시간과 사색을 즐기는 버튼은 코로나19로 인한 영향을 묻는 질문에 “다들 분리·격리돼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늘 남보다 더 외로운 편이라 특별한 고립을 느끼지 못했다”면서 “코로나19 이후 변했다기보다는 기존에 바빠서 못하던 것을 생각하고 창조할 시간이 더 확보돼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와 관련한 19점의 그림도 볼 수 있다”면서 “관람객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영감의 원천에 내 작품이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전시 관람은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하다. 버튼의 어린 시절 드로잉 원본과 노트를 ‘훔쳐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버튼은 절제의 시간인 사순절 직전에 벌어지는 유흥의 축제 ‘카니발’에서 모순성을 발견한 후 이를 유머와 공포가 융합된 ‘카니발레스크’로 구현했다. 빙글빙글 꼬인 혓바닥, 튀어나와 방황하는 눈동자, 기괴한 광대 모습 등이 대표적인 표현 방식이다. 영화의 콘셉트 드로잉, 회화·대본·스토리보드 등을 꼼꼼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버튼은 항상 작은 스케치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아이디어를 그린다고 하는데 종이가 없을 때는 냅킨을 이용하기도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냅킨 드로잉만 90점이 걸렸다. 실수로 흘린 붉은 소스까지도 버튼은 그림의 일부로 활용했다. 전시의 마지막은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그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코르크 메모보드에는 버튼이 구상 중인 신작 드로잉이 빼곡하다. 코로나19 이후의 변화상을 그린 19점의 신작도 여기에 붙어 있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버튼의 미공개 프로젝트를 찾아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