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써줬더니 돈 대신 그림 주더군요"

임재균 대필작가협회장
시중에 나온 책 10권 중 6권 대필
의사·기자·외교관까지 작가 활동
물물교환으로 원고료 대신 다반사
"완전 창작·비방·논문은 절대 금기
대필은 멋진 옷 만드는 것과 같아"

임재균 한국대필작가협회장이 대필 작가들의 활동 내용과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 대필 작가가 몇 년 전 지방 무명 화가로부터 자서전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어렵사리 작업을 끝내고 원고료를 받으러 찾아갔는데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돈이 없다며 원고료의 3분의 2를 자신의 그림으로 대신하자고 한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돈을 벌기 위해 책을 대신 써줬는데 대가가 길거리 작품 수준의 그림이라니. 허탈할 수밖에 없다.


2일 서울 문정동 가든파이브 사무실에서 만난 임재균(42) 한국대필작가협회장에 따르면 물물교환이 대필 작가 세계에서 얼마 전까지 흔하게 발생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임 회장은 “그나마 이렇게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차일피일 미루다 원고료도 주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며 “오죽하면 ‘대필 작가는 글쓰기가 반, 돈 받기가 반’이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할까”라고 말했다.


임 회장은 14년 차 대필 작가다. 처음부터 작가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원래 전공은 영어영문학. 중국어도 잘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쓸 곳이 없었다고 한다. 취업을 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회사가 망하면서 백수가 됐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대필이었다. 하지만 숨어서 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대필 작가로 나섰다. 얼굴도 공개했다. 2015년에는 대필 작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대필작가협회도 만들었다. 현재 회원은 540여 명에 달한다.


그는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책 10권 중 6권은 대필 작가의 손을 거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자서전이나 자기계발서, 교수가 쓴 저서 등의 경우 그 비율이 훨씬 높다고 한다. 임 회장은 “이 분야의 원저자들은 대부분 너무 수준을 높게 잡아 대중과 눈높이가 안 맞을 때가 많다”며 “이 경우 부드럽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다듬는 일을 대필 작가가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전문 작가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직업군도 대필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는 “대필 작가에는 의사도 있고 기자도 있다. 심지어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던 분도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있다”며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글쓰기로 확장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임재균 한국대필작가협회장

몇 년 전까지 임 회장에게 대필이란 ‘자영업’과 같았다. 돈을 받고 팔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대부분의 경우 평생에 한 번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 위해 자서전을 내는데 그것을 아무렇게나 쓰면 되겠냐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글이라는 멋진 옷으로 만드는 것이 대필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필을 할 때는 몇 가지 금기 사항이 있다. 일부 정치인들의 경우 없는 내용을 창작해 미화하거나 남을 비방하는 내용을 넣어달라는 부탁을 종종 했지만 이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게 임 회장의 설명이다. 문단에 등록을 하거나 학위 논문에 대한 대필 요구도 거절 사유다.


물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원고료를 받는 일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계약서대로 알아서 원고료를 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임 회장은 “대필 작가들이 돈을 받기 위해 원작자들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다”며 “이 경우 짧게는 석 달, 길게는 1년 정도 걸리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협회를 만든 이유 중 하나도 원고료를 좀 편하게 받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단체 이름으로 원고료 지급을 하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필 작가에 대한 인식이 이전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는 점에서는 위안을 얻는다. 이전에는 대필 작가라고 하면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라는 별칭에 걸맞게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꽁꽁 숨어서 지내야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임 회장은 “요즘은 대필 자체가 양성화되면서 ‘대필=공동 저작’이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는 듯하다”며 “책에 대필 작가가 누구인지 표시하거나 감사를 표하고 일부는 출판 기념회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고 현재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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