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땅에서 꿈꾸듯 그린 '지상의 낙원'

1955년 맨 먼저 미국 건너간 한인화가
뉴욕에 자리잡고…김환기·김창열 도와
미국 주류미술계와 교류 60년 활동
타계 이틀 전까지 그린 天生화가

포 킴의 1998년작 '따스한 섬'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붉은 말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란히 선 사람이 뻗은 팔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미국 뉴욕에서만 60년 가까이 활동했던 화가 포 킴(본명 김보현·1917~2014)의 후기작 ‘따스한 섬’은 선명한 색 그 자체로도 온기를 전한다. 단청과 색동저고리에서 봤을 법한 원색의 화사함은 타국에서 살아가던 화가가 뼛 속 깊은 곳의 아련한 그리움에서 길어올린 듯하다.


한국 화단이 잊었었고, 여전히 많은 대중이 모르고 있는 화가 포 킴의 개인전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뉴욕의 한인화가 포 킴’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6일 개막했다. 1988년에 완성한 ‘파랑새’를 시작으로 1990년대 이후의 작품 23점이 엄선됐다. 화사한 색감이 전시 제목 같은 ‘지상의 낙원’을 펼쳐보인다.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포킴은 법학 전공을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그림 배우는 일에 더 몰두했다. 당시 만난 치의학 전공의 첫 부인이 광주 출신이라 1946년 귀국 후 조선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같은 학교에 있던 오지호·천경자와 친분이 깊었다. 하지만 전후 사상대립이 극렬하던 때, 여수순천사건과 관련해 좌익으로 몰렸고 전기고문까지 당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쟁 후에는 미군 대령의 딸에게 미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친미 반동’ 소리를 들었으니 진저리가 날 만도 했다. 195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연구원으로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다.



포 킴의 1992년작 '일곱 개의 머리'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전시작 ‘일곱 개의 머리’는 작가가 한국에서 겪은 고초들이 배어있다. 40여년이 지난 일임에도 고통스런 기억들은 이따금 꿈결까지 찾아들곤 했다. 야수파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주의적 붓질 속에 희미한 얼굴들, 눈·귀·코·손·발 등이 분절된 채 등장한다.


포 킴은 어렵사리 뉴욕에 자리 잡았다. 백남준보다 빨랐고, 김환기보다도 먼저였다. 전업화가로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아 넥타이공장에서도 일했는데, 김환기·김창열에게도 공장을 소개해줬다. 한국 사람들을 챙기긴 했으나 예술적으로는 미국의 주류 미술계와 더 가까웠다. 추상미술의 아그네스 마틴, 팝아트의 로버트 인디애나, 전위예술가 쿠사마 야요이 등과 가까웠다. 1968년 결혼한 부인 실비아 올드도 작가들의 모임에서 만났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방한한 조영 포킴&실비아올드 재단 이사장은 “포 킴은 한국 화가로는 가장 먼저(1955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 주류예술계와 교류하며 6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작업한 유일한 화가”라며 “미국미술의 추상 표현주의나 액션페인팅을 받아들였지만 자신만의 독창적 방법으로 구현한 포 킴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 세계미술사 속에 한국미술사를 자리매김하는 데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포 킴은 1986~88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파랑새'를 자신이 근무했던 조선대학교에 기증했다. 먹색에 가까운 검은 물감을 빠른 필치로 휘둘러 인물과 동식물을 표현했고, 파란 새와 빨간 우산 등을 색으로 강조했다.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포킴은 1960년대 말까지 추상표현주의에 몰두했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는 돌연 구상 미술에 심취했고, 1980년대 이후 인물·동물·식물이 등장하는 독창적 세계를 이뤄냈다. 이 시기 이후 작업에 대해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장)는 “순수하고 서늘하거나 화려한 색채들이 가득차게 되면서 앙리 마티스를 연상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인도·중남미 등을 여행한 경험은 이국적이고 목가적인 ‘발리의 기억’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2000년 이후 그린 ‘탑’ ‘호랑이’ 등에서는 여전히 아름다운 고국의 추억, 당당한 한국인의 자부심을 내비친다.



포킴의 2003년작 '발리의 기억'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학고재갤러리에서 6일부터 6월12일까지 열리는 포킴 개인전 전경.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포킴의 2000년작 '탑'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포킴의 2010년작 '창작1'(왼쪽)과 '창작4'에서는 90세를 훌쩍 넘겼음에도 끝없이 실험과 탐구를 이어간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말년작 ‘창작’ 시리즈에서는 진짜 골격만 남은 성냥같은 형태의 사람들이 꿈틀대고 끌어안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타계 이틀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천생화가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포킴이 미국으로 건너간 후 40년 가까이 고국은 그를 잊고 지냈다. 1995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이 연 원로작가 초대전을 통해 컴백을 알렸다. 당시 평론을 뉴욕근현대미술관(MoMA) 출신의 바바라 런던이 썼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김보현 화업 60년전’이라는 이름으로 덕수궁 전관 전시를 열어 240여 작품을 공개했다. 2013년 재외동포유공자로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그해 경남도립미술관이 작가부부로서 ‘김보현과 실비아 올드’ 전시를 개최했다. 작가 사후인 지난 2017년 환기미술관이 탄생 100주년 회고전을 열었다. 한국의 상업화랑이 기획한 대규모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6월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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