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옥 칼럼]왕치산 중국 국가부주석이 서울에 온 까닭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미동맹이 中겨냥 성격 분명해지면
中 '韓중립' 선제적 입장 표명가능성
이달 열릴 한미정상회담이 첫 시험대
불필요한 수사보다 내용 중시할 필요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중국 정치에는 관례와 잠정 규칙이라는 비공식적인 규범이 있다. 이 중의 하나가 68세가 되면 정치국 상무위원을 보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당시 69세였던 왕치산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 기율검사위원회 주임에서 물러났지만 연령제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 국가부주석으로 발탁돼 건재를 거듭 확인시켰다. 그는 중국의 최대 현안이었던 농촌 개혁에서 성과를 낸 데 이어 금융 업무 등 거시경제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특히 아시아 금융위기, 사스(SARS) 때 소방수 역할을 했고 반부패 운동의 최일선에서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면서 시진핑의 권력 기반을 공고화했다.


이런 화려한 이력을 지닌 왕치산이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시진핑 특별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과거에도 한국의 대통령 취임식에 중국 정부가 정치국원 또는 중앙위원급 인사를 보내기는 했으나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연기할 정도로 심각한 코로나 국면에 국가부주석을 파견한 데서 단순한 취임식 축하 사절이 아니라 중국의 외교적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미국 부통령의 남편인 세컨드 젠틀맨이 축하 사절단 대표로 취임식에 참석하고 5월 말 조 바이든 대통령의 한국 방문 일정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후진타오 정부는 한중 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 격상시켰다. 당시 중국은 가치와 제도를 달리하는 한국 정부가 과도하게 한미 동맹에 경사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미국발 금융위기 가운데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명박 정부도 한미 동맹을 강화할수록 중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게 되고 북한 체제 변화를 위해서는 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후 정권이 두 번 바뀐 후 출범한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라인에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 참모들이 다시 모여 글로벌 중추 국가라는 외교정책의 비전을 만들었고 “한중 정상 교환 방문 및 고위급 간 교류·소통 강화, 실질 협력 증진을 통한 상호 존중과 협력, 한반도 평화·안정 및 북한 비핵화를 위한 협력, 경제·공급망·보건·기후변화·환경·문화 교류”라는 한중 관계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과거 발언과 해외 기고문에 비춰보면 한미 동맹을 강화할수록 중국은 한국에 주목할 것이고 북한이 비핵화를 한다면 북한의 재건을 도울 수 있다는 과거 정책 기조가 다시 호명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새 정부 출범식 축제를 마친 후 미국과 중국 모두 우리에게 청구서를 내밀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중 견제에 한국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요청할 것이고, 중국도 한국이 최대한 중립 지대에 남도록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쓸 것이다. 왕치산 부주석의 한국 방문은 이런 중국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한 시진핑 주석의 발언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의 위상 정립이 중장기적 과제라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 조율은 단기적 현안이다. 더구나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제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상호 방문을 통한 정상회담과 고위급 회담이 여의치 않은 소통 기제의 한계도 있다. 북한이 중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지속하고 추가 핵실험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에서 한국은 ‘북핵 비핵화’에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요구할 것이고,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 해결을 바랄 것이다. 물론 중국은 사드 배치에 따른 경제 보복의 부정적 효과를 학습했기 때문에 당분간 전선을 확대하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겠지만 한미 동맹이 중국을 겨냥하는 성격이 더욱 분명해지면 선제적으로 입장 표명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5월 한미정상회담은 그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점에서 한미 동맹의 ‘재건’ ‘회복’이라는 불필요한 정치적 문법을 빼고 한미정상회담도 내용을 중시하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한중 관계의 창과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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