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인력 '가뭄'에…문과생 뽑아 교육, 동남아 등 해외 충원까지

1부. '다이내믹 코리아' 기업에 달렸다
<2> 인재 기근 시달리는 한국-첨단산업 경쟁력 상실
매년 반도체 1500여명·미래차 2000여명 부족한데
각종 규제 묶인 기업들, 인재 키우기 보다 '쟁탈전'
디스플레이 분야는 올 인력양성 국책과제서도 빠져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이 지난해 10월 2일(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글로벌 포럼에서 글로벌 우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회사 전략을 소개 하고 있다. 사진 제공=SK이노베이션


# 반도체 설계 업체인 A사는 최근 10년 이상 경력의 설계 엔지니어 1명을 뽑는 데도 실패해 결국 상시 채용 체제로 전환했다. 설계 전문가가 전국에 200명 남짓밖에 안 되다 보니 채용 공고만으로는 도무지 지원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석사 출신을 신입 직원으로 채용해도 육성 기간만 4~5년이 걸리는 탓에 인력 유출이 빈번하다. A사 관계자는 “핵심 회로를 설계할 고급 인력이 한참 모자라 마치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듯한 상황”이라며 “어려운 자금 사정으로 연봉을 더 올릴 수도 없어 해외 인력을 채용하거나 문과생을 채용해 교육시키는 회사도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 원자재 값 급등 등 각종 대외 악재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산업계가 고질적인 고급 인력난에 더욱더 머리를 싸매고 있다. 저출산에 지방 근무 기피, 임금 눈높이 불균형 등이 겹치며 인력 부족 문제는 반도체와 배터리·자동차·디스플레이·조선·정보기술(IT)·바이오 등 우리나라 주력 수출산업 전 부문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인재 규모 자체를 키우기보다 한정된 고급 인력을 서로 뺏고 빼앗기는 경쟁만 펼치는 형국이다. 시장구조 등 현실을 외면한 각종 규제 정책이 인력 수급 왜곡을 더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추산에 따르면 2019년 19만 9000명이었던 이공계 대학 입학 가능 자원은 2030년 15만 1000명 수준으로 24%가량 감소한다. 과학기술 분야 학사 이상 신규 인력도 2019년부터 2023년까지 800명 부족 상태에서 2024~2028년 4만 7000명으로 부족 인원이 늘어날 예정이다. 새 정부 임기 말쯤에는 산업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인력이 부족해지는 셈이다. 국내 굴지의 B 전자 업체 대표는 “일류 대기업도 국내 인력이 부족해 해외 인력을 써야 하나 고민하는 수준”이라며 “오늘날 기술 개발은 단순히 공학뿐 아니라 기초과학까지 융합해야 하는데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이공계 전반에 인력이 부족한 상태”라고 우려했다.


당장 한국의 최대 먹거리 업종이자 세계적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반도체 분야부터 비상이 걸렸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발표한 ‘산업 기술 인력 수급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반도체 부문 산업 기술 인력 부족 인원은 1579명. 반면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반도체·세라믹공학 관련 석·박사 졸업생은 2018년 136명, 2019년 92명, 2020년 115명, 2021년 146명에 불과하다. 연간 1000명 이상에 달하는 기업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업종들의 인력난은 반도체 분야보다 더 심각하다. 임금 수준이 높은 반도체 업종과 달리 배터리·전기차·디스플레이 등의 경우 여유 자금을 미래 투자에 주로 쏟아붓는 상황이라 인재 유인 여력이 더 떨어지는 형국이다.


한국전지산업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배터리 업계 부족 인력은 연구·설계 인력(석·박사급) 1013명, 공정 인력(학사급) 1810명이다. 정부가 지난해 7월 범정부 차원의 배터리 산업 지원 대책을 내놓으면서 연간 1100명 이상의 전문 인력을 키워내겠다고 공언했지만 아직 현장에서 체감할 수준은 아니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정부는 2003년과 2010년에도 2차전지 산업 육성을 위한 대규모 인력 양성을 약속한 바 있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SK이노베이션(096770)(계열 분리 후 SK온)·삼성SDI(006400) 등 주요 기업들은 모자라는 인력을 해외에서 충당하기 위해 미국 등에서 채용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기업들은 동남아시아의 우수 인력을 찾아다니고 있다.


배터리 업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냥 전공자가 아닌 ‘고급 인력’인데 좋은 대학의 석·박사과정 학생들은 기업으로 안 오고 교직이나 국가 연구소로 가는 것을 선호한다”며 “산업이 커진 지 얼마 안 된 업종이라 유럽·중국 등 신생 배터리 업체로 한국 배터리 3사 인력이 유출될 우려도 있다”고 밝혔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는 아예 올해 인력 양성 국책 과제 대상에서도 빠지는 수모를 당했다. 11개 국책 과제에 174억 7700만 원을 투입하는 산업부의 ‘산업 혁신 인재 성장 지원 사업’에 디스플레이 관련 과제는 전혀 없었다. 현재 진행 중인 기존 과제는 2024년께 모두 마무리된다. 중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디스플레이 업계 입장에서는 가중되는 인력난에 산업 경쟁력 하락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재 부족에 신음하는 것은 미래차 업종도 마찬가지다. 산업부와 KIAT에 따르면 자율주행차 등 미래차 산업 기술 인력은 2028년에 8만 9069명이 필요하다. 2018년 5만 533명에서 매년 5~6%씩 인력이 늘어야 충당할 수 있는 숫자다. 이에 반해 2020년과 2021년 자동차공학 석·박사 졸업생 수는 고작 209명, 173명에 그쳤다. 소프트웨어·기계 등 자동차에 필요한 다른 전공자까지 포함하더라도 부족 인력이 매년 2000명 이상에 달한다는 게 업계의 후문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동차 생산량이 우리나라의 2.5배 수준인 미국은 차량용 소프트웨어 인력이 2만 8000명에 달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1000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대기업들의 상황도 이렇다 보니 중소·중견기업들에 고급 인력 유치는 사실상 ‘그림의 떡’이 됐다. 사업체가 외진 지방에 위치할수록 젊은 인재들의 외면 양상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 관련 C 중견 업체 관계자는 “신입 인력을 뽑아도 대부분 3년이 지나면 큰 기업으로 옮긴다”며 “직원들이 원하는 대기업 수준의 연봉을 맞춰주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영남권의 대기업 협력 업체 D사 관계자는 “필요 인력은 120명인데 100명 남짓한 인원으로 납기를 맞추다 보니 고객사의 항의를 받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며 “수도권 선호가 심해져서 인력 공고를 내도 과거에는 70명 정도가 지원을 했던 자리에 이제는 겨우 2명만 지원한다”고 답답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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