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골프만큼 민감한 스포츠가 있을까. 골프 인구 500만 시대가 됐다지만 여전히 따가운 시선이 존재한다. 공무원에게 골프는 가급적 멀리해야 할 오락이다. 자칫 출셋길이 막힐 수 있다. 서열 맨 꼭대기에 있는 대통령의 시각에 따라 공직 사회의 골프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는 언제부턴가 대통령이 라운드를 하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대통령이 원래부터 골프를 멀리했던 건 아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으로 파괴됐던 군자리 코스(현 어린이대공원 자리)를 재건하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 컨트리클럽(CC)의 창립을 주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골프를 하지 않았지만 집권 이후 애호가가 됐다. 군자리 코스를 비롯해 서울·한양, 뉴코리아, 태릉, 그리고 안양CC 등에서 라운드를 즐겼다. 태릉CC는 그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청와대로 돌아가기 전에는 막걸리를 마시고는 했는데 그 술집이 유명해지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골프를 가르쳤던 한장상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고문은 “그분은 라운드를 할 때도 나라 걱정을 참 많이 했다”고 기억했다.
앞뒤 홀을 하나씩 비우게 하는 ‘대통령 골프’라는 말은 전두환 전 대통령 때 나왔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골프를 가장 좋아했다. 청와대 내에 골프연습장을 만들었을 정도다. “29만 원밖에 없다”던 말년에도 지인들과 라운드를 즐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골프와 관련해 가장 큰 어록을 남긴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골프 안 친다”는 그 한마디에 골프계는 암흑기를 맞았다. 1989년 당시 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공화당 총재이던 김종필과 라운드를 하다 엉덩방아를 찧은 일도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무원이) 바쁘셔서 그럴(골프를 할) 시간이 있겠어요” 발언도 한동안 골프계를 살얼음판으로 만들었다. 이에 반해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골프 대중화 정책을 폈다.
해외는 어떨까. 미국은 ‘골프광’ 대통령이 많아 재임 중 라운드를 얼마나 자주 했는지 언론이 체크하기도 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마스터스를 개최하는 오거스타내셔널 골프클럽의 회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을 정도로 골프를 사랑했다. 빌 클린턴은 벌타 없이 한 번 더 치는 멀리건을 남발해 ‘빌리건’으로도 불렸고, 부인을 따라 뒤늦게 입문한 버락 오바마는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너무 많은 라운드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오바마는 8년의 재임 기간 중 306회 골프장을 찾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역대 대통령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난 데다 다수의 골프 리조트까지 소유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골프를 외교에 적극 활용했다. 트럼프의 취임식 때 골프채를 선물했는가 하면 그와 골프 회동도 자주 했다. 몸 개그로 웃음도 선사했다. 2017년 벙커에서 나오다 중심을 잃고 뒤로 벌러덩 넘어진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대회는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이다. 1954년 창설됐다. 처음에는 ‘대통령배’ 대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시상식에 참석해 트로피 수여도 했다. 하지만 1960년 4·19혁명 이후 윤보선 정부는 ‘대통령배’란 관명을 회수했다. 1961년부터 대회명에서 대통령배가 빠졌다가 10년 후인 1971년 다시 붙었다. 그 후 ‘사회 특수층이 즐기는 골프에 대통령배 이름을 붙이는 건 위화감을 준다’며 1976년부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으로 되돌아갔다.
대통령배는 영어로 ‘프레지던츠컵’이다. 현재 유럽을 제외한 인터내셔널 팀과 미국 팀의 골프 대항전이 프레지던츠컵이라는 이름으로 2년마다 열리고 있다. 개최국 행정부 수반이 명예 의장을 맡는데 한국에서도 2015년 치러졌다. 2017년 미국에서 열린 대회 때는 필 미컬슨의 셀피 배경으로 클린턴, 조지 W 부시, 오바마 대통령이 함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달 한국갤럽이 발표한 ‘골프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골프가 사치스럽다는 인식은 응답자의 36%였다. 이는 1992년 조사 때의 76%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든 수치다. 응답자의 34%는 ‘골프를 칠 줄 안다’고 했다.
이쯤이면 한국에서도 대통령과 프로 골퍼가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을 맞아 하게 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