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일 같이 기업 공개(IPO)를 추진했다가 포기하는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업은 상장 철회는 없다고 장담 했다가 이틀 만에 번복하며 체면을 구겼습니다. 뚜렷한 이익이 없어 기업가치를 매기기 어려웠던 플랫폼 기업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내실 있는 순이익을 벌었던 기업 마저도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기업의 경영진이라면 이런 때 구태여 상장을 하기 보다는 훗날을 노려보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상장에 도전하는 기업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친절한IB씨는 이들 기업과 투자자의 말 못할 속사정을 들어봅니다.
최근 상장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기업 중 한 곳. 바로 11번 가 입니다. 11번가의 상장 추진 소식에 저희 회사 편집국에서도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커머스 업계에서 기대한 만큼의 확장성을 보이지도, 순익을 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11번가의 시장 점유율은 6%로 네이버(17%), 쓱닷컴·이베이(15%), 쿠팡(13%)보다 낮습니다. 실적은 지난해 영업손실 694억 원을 기록하며 2020년(98억 원)에 이어 2년 연속 영업 적자 입니다. 2019년 이후 매출액이 5000억 원 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누가 봐도 공모주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회사 스스로 현재까지 다양한 시도를 하느라 순익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시도의 결과물이 나올 때 쯤 상장을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11번가는 2019년 국민연금과 새마을금고의 투자를 받으며 수용한 빡빡한 상장 조건이 때문에 지금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주주 간 계약을 보면 2023년 9월 30일까지 상장 기한을 정해 놓았습니다. 또한 2022년 5월 31일까지 상장 예비심사청구를 하도록 규정했습니다. 11번가는 이제 막 상장 주관사를 정하기 위해 주요 증권사에게 제안을 해달라고 요청한 상태인데요. 보통 실제 상장에 이르기까지 1년 이상 걸리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 합니다.
주당 공모가격은 투자자의 내부 수익률(IRR) 3.5%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구도 들어 있습니다 . 만약 11번가가 고의로 혹은 상당한 이유 없이 이 같은 요건을 지키지 않은 경우 투자자에게 내부 수익률 8% 에 해당하는 금액을 갚아야 합니다.
11번가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이 상장전 투자유치(프리IPO)라는 이름으로 사모펀드(PEF) 등 재무적 투자자로부터 투자를 받을 때는 이 같은 상장에 관한 약속을 합니다. 보통 3~5년 이내 일정 가격 이상으로 상장을 추진해 투자 수익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지요.
카카오모빌리티·LGCNS·원스토어·CJ올리브영 등 최근 상장을 추진 중인 많은 기업은 여러 PEF의 투자를 받았고, 이들은 이번 상장을 계기로 투자 수익을 돌려 받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2017년부터 투자를 받기 시작해 기업과 투자자가 비교적 오랫동안 동고 동락한 사이입니다. 그런 만큼 이들은 카카오모빌리티의 이사회나 산하 소위원회를 통해 경영에 일부 참여하고 있습니다. 카카오모빌리티 투자자들은 상정 여부나 시점, 상장 주관사 선정 여부까지 관여합니다. 초기 투자자를 기준으로 하면 투자 6년 차가 되는 올해는 상장을 해야 하는 시점인 만큼 이들은 현재까지는 상장 철회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LGCNS 역시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모펀드에게 지분을 일부 넘겼습니다. 이들은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LG가 투자자에게 중대한 요건을 어기면 투자자의 지분을 일정 가격 이상으로 되사주는 규정을 넣었습니다. 업계에서는 상장이 중대한 요건에 해당할 것으로 봅니다.
교보생명은 이 같은 노력을 하지 않고 마냥 상장을 미뤘다가 투자자가 국제 중재까지 신청하면서 장기간 소송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상장 시점을 약속했다고 하더라도 상장 자체가 위태위태한 상황입니다. 이런데도 굳이 상장을 시도하는 이유는 뭘까요. 투자업계에서는 바로 상장이 안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상장을 위해 주관 증권사를 선정하고 상장예비심사청구를 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보여주고 그랬는데도 안 됐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서죠.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와 맺은 계약을 상황에 따라 변경할 수는 있지만, 그 전에 실제로 최선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PEF입장에서도 기업들의 상장 철회 사례를 토대로 펀드에 출자한 기관투자자에게 ‘상장이 어렵다고 하니 더 기다리자’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황이 더욱 어려워진다면 PEF가 마냥 기다릴 수 없겠지요. 최근 두나무나 카카오모빌리티, 컬리, 직방의 기존 투자자들이 일부 지분을 팔고 있는데요. 상장을 기대하고 투자했지만, 자꾸만 미뤄지고 가치가 떨어지니 지금이라도 현금으로 확정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아쉽겠지만, 막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때 대박의 꿈을 꾸며 손을 잡았던 기업과 투자자. 지금은 어디까지가 하락의 끝일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언제까지 손을 맞잡을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가 진정한 파트너십이 가려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