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개막해 15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아트부산이 총 746억원의 작품 판매액을 거둬들였다. 관람객은 10만 2000명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예술애호와 미술투자에 대한 열기가 달아오른 상황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거리두기까지 해제되면서 폭발적으로 관람객이 몰렸기 때문이다. 아트부산 측은 16일 행사 결과를 이같이 발표하며 “미술시장의 호황에 힘입어 참가 갤러리 수가 전년 대비 20% 정도 늘어남에 따라 방문객 수도 자연스레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아트페어 입구에 들어섰을 때의 첫인상이 행사의 전반적 분위기 암시한다면, 올해 아트부산은 고가의 미술관급 작가를 거래하는 대형갤러리와 MZ세대의 감성을 자극하며 급성장 중인 신진갤러리의 공존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입구 정면의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는150만달러(약 20억원) 상당인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대형 회화를 부스 한가운데 걸었다. 미술관이나 교과서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작품의 양쪽으로 게오르그 바셀리츠와 안토니 곰리의 최근작이 선보였다. 로팍은 약 8억원에 달하는 곰리의 신작 조각과 함께 알렉스 카츠·이불·맨디 엘사예의 작품을 ‘솔드아웃’했다.
바로 옆 부스 갤러리스탠은 1980~90년대생 작가를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신생 갤러리다. 왕성한 SNS 활동으로 ‘팬덤’을 확보한 김둥지·그라플렉스·이소윤·제임스진·백향목·GBDAY·아신·Chocomoo 등의 전속 작가를 전면에 내세웠고, 정통 미술계에서는 낯선 이름들임에도 그림을 사기 위해 방문객이 북적였고 출품작의 90%가 첫날 모두 팔렸다.
갤러리현대는 ‘LOVE’로 유명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대표작 숫자 시리즈를 0부터 9까지 한 줄로 세워 전시했고, 정상화·이건용·이강소·김민정 등의 작품은 첫날 ‘완판’됐다. 가나아트에서는 심문섭·김구림의 출품작이 모두 팔린 가운데, 조르디 커윅 등 해외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작가 작품 앞에서 유난히 사진을 찍는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국제갤러리에서는 유영국의 작품이 14억원에 거래됐다. 학고재에서는 13억원대 백남준의 1994년작 ‘인터넷 드웰러’가 판매됐고, 김현식의 노란색 입체회화 9점 연작이 한 명의 컬렉터에게 소장됐다. 전통있는 화랑의 저력을 과시하듯 박여숙갤러리는 ‘침묵의 소리’라는 주제 아래 박서보·김창열의 대작과 권대섭의 백자를 기획전으로 선보였다. 표갤러리는 박선기의 설치작, 매즈 크리스텐센의 빛 작업, NFT 작품들을 대거 선보였다.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으로 현지 개인전이 한창인 ‘한지화가’ 전광영의 작품을 여러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베니스 효과’로 분석된다.
50억원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남자의 얼굴과 앉아있는 누드’(1964)를 들고 아트부산에 처음 참가한 미국의 그레이 갤러리도 이목을 끌었다. 피카소의 작품은 아트페어가 끝난 현재 ‘판매 예약’ 상태라 애프터세일(행사 종료 후 거래)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된다. 그레이갤러리는 한쪽 외벽 전체를 데이비드 호크니의 8m 폭 대형 벽화로 채워 눈길을 끌었다. 6억원을 웃도는 이 작품은 개막과 동시에 판매됐고, 갤러리 측은 “다른 에디션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대표작가인 카츠의 꽃그림과 인물화가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고, 국내에서도 공공미술로 친숙한 스페인 작가 하우메 플렌자의 대형 청동두상 ‘초록 숲(마리아)’도 약 5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그레이갤러리는 1963년 설립된 명문화랑이다. 발레리 카베리 그레이갤러리 디렉터는 “행사 분위기와 시설, 관람객 반응이 매우 좋다”면서 “이미 우리는 15년 가량 관계를 지속해 온 한국의 서포터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크니의 벽화 맞은 편에서는 갤러리바톤이 제주의 이국적 풍경화로 유명한 김보희의 대작 특별전을 선보였다. 바톤은 참가하는 아트페어마다 눈길 끄는 기획력으로 부스 전시를 꾸미는 것으로 정평 나 있다.
지난해 아트부산의 ‘스타’였던 페레스 프로젝트는 도나후앙카의 신작 4점, 미술관에서 전시된 적 있는 마뉴엘 솔라노의 작품, 리처드 케네디의 대작과 소품 등을 새 주인의 품에 안겨줬다. 특별전 작가 오스틴 리의 작품도 개인 컬렉터에게 소장됐다.
대형 갤러리가 중앙부를 차지했다면 외곽부스는 중소화랑들이 포진했다. 삼청동 갤러리애프터눈은 ‘신세대 박수근’으로 불리는 김희수 작가의 개인전 부스를 꾸려 170점 이상을 ‘솔드아웃’ 시켰다. 김아미 애프터눈 대표는 “신작 캔버스 21점은 개막전에 판매 예약이 완료됐고, 구작 드로잉 100점은 첫 날 방문객들이 줄 서서 구입했다”면서 “단숨에 다 팔릴 줄 몰랐던 터라 둘째날부터는 드로잉 작품의 이미지만 보여드리고 예약을 받고 있는데 그것도 50점 이상 판매됐다”고 말했다. 윌링앤딜링에서는 엄유정의 작품에 대한 문의가 많았다. 김희수와 엄유정의 공통점은 미술계 최고의 인플루언서인 방탄소년단(BTS)의 RM이 개인전을 다녀갔다는 점이다. 에이라운지,디스위켄드룸,피비갤러리,기체, 갤러리 이알디 등 기획력과 작가 발굴·관리로 명성을 쌓은 곳들이 유난히 북적였다. 수십만원 대부터 몇백만원 수준인 가격 경쟁력도 흥행 요인으로 분석된다.
아트부산 현장에서 만난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갤러리들 간에 더 좋은 전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경쟁심이 엿보일 정도로 좋은 작품을 출품했다”면서 “‘아트파리’(아트페어) 못지 않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작품 거래 양상에 대해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가격대별로 고루 거래돼야 건강한 미술시장”이라며 “소위 영리치(Young Rich)라 불리는 MZ세대 구매자들의 취향에 따라가기보다는 선도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트부산’이 10년을 넘기며 이제 부산은 명실상부 예술도시로 성장했다. ‘아트바젤 마이애미’가 휴양도시의 장점을 내세워 여행과 아트투어를 접목시킨 것처럼 이곳에서도 “휴가내고 그림 사러 부산에 왔다”는 방문객들을 제법 만날 수 있었다. 대형 아트페어 기간에 ‘위성 아트페어’가 열리듯 인근 롯데호텔 시그니엘 부산에서는 롯데백화점이 야심차게 기획한 제1회 롯데아트페어가 열렸다. 10~14일 열린 이 아트페어는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디자인·공예와 라이프스타일의 접목을 시도해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김창열의 ‘물방울’이 그려진 뱅앤올룹슨의 스피커, 박서보의 ‘묘법’을 옷처럼 입은 알레시의 와인오프너가 독점 공개돼 관심을 끌었다. 통영의 자개 장인과 이탈리아 가구디자이너가 협업한 테이블을 비롯해 클레토 무나리 컬렉션과 멤피스 가구들, 카페트와 조명 등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와 함께 백남준·전광영·심문섭·이수경·케니 샤프 등의 작품이 호응을 얻었다.
해운대 영무파라드호텔에서는 ‘더 코르소 아트페어’가 열렸다. 인근 파라다이스,롯데 시그니엘,그랜드조선,신라스테이 등의 호텔은 특수를 누렸다. 부산으로 예술여행 온 방문객들은 벡스코 건너편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기획전 ‘나는 미술관에 ○○하러 간다’, 한국현대미술작가 조명전 ‘이형구’ 등을 통해 안목을 드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