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투자 미루고 경비 줄여도 2.6조…"혈세 투입 수순 밟을 듯"

[年 30조 손실 위기에 한전 '6조 자구책']
긴급사장단회의 열어 자구안 발표
자산 팔아 3.4조 마련한다지만
긴축경영 보전비 빼곤 불확실
헐값 매각·국부 유출 우려도
'연료비 연동제 정상화' 안돼
전력시장 대수술도 서둘러야



1분기에만 8조 원에 달하는 영업손실을 기록한 한국전력이 보유 부동산은 물론 발전 자회사 지분과 해외 사업을 처분해 6조 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연료비 연동제 정상화 등 전력 시장 개편 없이는 ‘마른 수건 쥐어짜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한전의 적자가 경영상 문제보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과 전 정부의 무리한 탈원전 정책에 기인했던 만큼 이번 자구책이 알짜 자산의 헐값 매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18일 한전은 한국수력원자력, 발전 자회사 등 10개 사와 ‘전력그룹사 비상대책위원회’를 개최하고 6조 원 규모의 자구책을 발표했다. 전력 자회사 출자 지분 매각으로 8000억 원, 보유 부동산 처분으로 7000억 원, 해외 진출 사업의 구조조정으로 1조 9000억 원, 투자 사업 이연 및 경상 경비 감축 등 긴축 경영으로 2조 6000억 원을 보전한다는 내용이다. 지분·부동산 매각과 해외 사업 구조 조정은 즉시 추진한다.


이 외에 석탄 공동 구매 확대 및 구매 국가 다변화로 연료 구입 단가를 절감하고 장기 계약 선박의 이용 확대와 발전사 간 물량 교환으로 수송료 등 부대 비용을 줄인다는 계획도 밝혔다. 정승일 한전 사장과 전력그룹사 사장단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던 구조적·제도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 전력그룹사의 역량을 총결집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긴축 경영으로 절감하는 2조 6000억 원 외에는 모든 게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한전의 올해 적자가 최대 30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번 자구책으로는 급한 불을 끄기도 벅차다.


특히 이번 자구책에서 해외 사업 구조 조정과 지분 매각은 ‘제 살 깎아 먹기’라는 비판도 나온다. 매각을 추진하는 해외 사업이 우량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전은 현재 전 세계 25개국에 48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2020년 말까지 이들 해외 사업의 매출액은 37조 5000억 원, 순이익은 3조 6000억 원에 이른다. 연료비 급등에 따라 세계 각국이 전기요금을 올리고 있는 만큼 한전이 올해 해외 사업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이익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해외 사업의 포트폴리오도 탄탄하다. 개발도상국에는 석탄발전을, 미국 등 선진국에는 태양광발전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한전은 그동안 성공적인 해외 사업 수행을 통해 추가 사업 진출을 노리고 있다. 해외 사업을 모두 매각한다면 모든 실적이 물거품이 된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한전의 해외 사업은 우량 산업이 대부분이라 순식간에 매각될 것이고 전력 산업의 해외 진출 기반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며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당시처럼 자산 처분이 급한 상황도 아니고 한전의 위기가 경영 방만 때문도 아닌데 이들 사업을 매각하는 것은 국부 유출”이라고 꼬집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전 관계자도 “해외 사업은 수익이 나쁘지 않았다”며 “매각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라고 밝혔다.


지분 매각도 마찬가지다. 한전이 4000억 원 규모(14.77%)의 지분을 매각하겠다고 밝힌 한전기술은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사업 관리를 담당하는 업체로 현 정부의 원전 해외 수출과 맞물려 가치가 더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실제 한전 해외원전사업처는 지난달 영국 현지에서 산업에너지부와 만나 원전 건설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한전은 또 비상장 자회사 지분은 정부와 협의해 상장 후 매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공개적으로 매각 계획을 밝힌 자회사를 상장했을 때 제 값을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전기요금 동결과 탈원전 정책이 한전의 알짜 자산 매각을 부른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전기요금을 동결하다가 문재인 전 대통령 퇴임 직전 대통령 선거 이후인 4월과 9월에 전기료를 올리겠다고 밝혔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문 전 대통령은 막상 본인 임기 때는 연료비 연동제를 무력화하면서까지 전기료를 묶어놓았다가 새 정부 출범 이후 올라가도록 발표했다”며 “한전과 윤석열 정부 모두 손발이 묶인 상태”라고 밝혔다.


한전이 벼랑 끝에 몰린 만큼 결국 재정 투입 수순을 밟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전은 빚으로 운영 자금을 조달하는 상황이다. 올해만도 15조 600억 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적자 누적 속에 차입금이 늘어 내년부터 사채 발행 자체가 막힐 수 있다. 이 경우 한전은 곧바로 자본잠식 위험에 노출된다. 한전은 2조 7980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2008년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정부로부터 6680억 원을 지원 받은 바 있다. 허은녕 서울대 교수는 “한전의 자구책 발표가 재정 지원을 위한 일종의 명분 쌓기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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