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사들이 과거 러시아 선주들과 맺었던 수조 원 규모의 선박 계약이 무더기로 해지될 상황에 처했다. 서방 제재로 러시아의 대금 결제가 불가능해지면서 러시아로부터 발주를 받은 조선사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18일 대우조선해양(042660)은 2020년 10월 수주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쇄빙선) 1척에 대해 러시아 선주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건조 대금(중도금)이 기한 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계약이 파기된 선박 대금 규모는 약 3300억 원 수준이다.
당시 수주한 LNG 운반선은 총 3척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고 제재가 길어질 경우 나머지 2척 역시 건조 대금이 미지급될 가능성이 높다. LNG 운반선 3척의 공급 금액은 1조 137억 원 규모다. 현재 러시아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되면서 대형 러시아 에너지 기업 등 선주들이 국내 조선사에 대금을 납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우조선해양이 계약을 해지한 러시아 선주는 러시아 가스 기업인 노바테크로 추정된다. 노바테크는 가스프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천연가스 생산 업체다. 이 회사는 북극권 석유·가스전을 보유하고 있어 국내 조선사들에 대규모 쇄빙선 수주를 맡겼다.
유럽연합(EU)의 러시아 에너지 산업 제재로 노바테크는 북극 일대에서 건설 중인 ‘아크틱 LNG 2’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일부 글로벌 에너지 기업과 조선사들은 이미 자산을 손실 처리하는 등 조치에 나섰다. 하지만 해당 사업에 참여하는 국내 조선사들은 대금 미수취에 따른 충당금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
노바테크의 아크틱 LNG 2 프로젝트에는 삼성중공업(010140)도 참여하고 있어 러시아의 대금 미지급 사태가 업계 전반으로 확산할 우려도 있다. 지난해 삼성중공업은 이 프로젝트에 투입될 LNG선 4척을 수주했다. 선가 역시 한 척당 3000억 원 수준으로 총 1조 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북극 항로에 주로 쓰이는 쇄빙선의 경우 수요가 극히 드물어 다른 선주에 재판매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밖에 삼성중공업은 러시아 조선사 즈베즈다와 합작법인을 만들고 공동으로 선박을 건조하는 사업을 진행 중인데 이 또한 미래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현대삼호중공업은 당장은 아니지만 2024년까지 LNG선을 러시아 선주에 3척 인도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러시아 사태가 장기화하면 국내 조선사 전반으로 문제가 파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 업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329180)그룹·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가 러시아로부터 수주한 금액은 약 80억 달러(약 10조 1800억 원) 수준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중공업이 50억 달러로 가장 많고 대우조선해양(25억 달러), 현대중공업그룹(5억 5000만 달러)이 뒤를 잇고 있다.
러시아에서 수주한 조선사들은 아직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대금이 미지급돼 선주에 통보를 한 상황으로 현재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며 “공정이 많이 진행된 상황이 아니라 큰 손실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삼성중공업 측도 “대금 지급에 대한 협의를 진행 중이며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LNG선 발주가 크게 늘어나는 것도 조선사들 입장에서는 러시아 사태에 따른 위험을 다소 줄일 수 있다. 삼성중공업은 LNG 운반선을 이달에만 5척 수주했다. 총 수주 금액만 1조 4500억 원 규모로 올해 수주 목표(88억 달러)의 38%를 이미 달성했다.